I’ll take it from here (여기서부터는 제가 할게요)

2009년, MBA를 마치고 오라클에 정식 입사해서 제품 관리자(Product Manager)로 일하게 되면서 미국에서의 첫 보스를 만났다. 이름은 플로리안(Florian). 프랑스 출신인 그는 밝은 성격과 푸근한 인상을 가졌고, 어떤 상황에서도 느긋하게 유머를 찾았다. 미국에서 인턴십 경험이 전부였던 나에게, 그리고 회사에서 해고되기라도 하면 미국을 떠나야 하는 불안정한 ‘외국인 노동자 (H-1B 비자)’ 신분이었던 나에게, 어쩌면 딱 맞는 보스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자주 썼던 말이 있다.

I will take it from here (여기서부터는 제가 할게요).

무슨 말이냐 하면, 나에게 뭔가 일을 시키고 난 후, 내가 며칠간 고심해서 일을 해서 갖다 주면, 그는 살펴보고 나서 “I will take it from here” 라는 말을 자주 썼다. 물론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차이가 크거나, 그 다음 단계에 더 해야할 일이 있으면 그 일에 대해 지시를 내리기도 했지만,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에 왔다 싶으면 거기부터는 자기가 알아서 할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 나는 크게 안도하고 마음을 깨끗이 비운 후 그 다음 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 일들을 모두 자신의 일로 포장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가 시간을 내어 내가 만든 문서를 일일이 수정해서 보고한 후, 그 모든 걸 내가 다 했다는 듯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는 처음에 너무 어색하고 불편해서, 진짜 이래도 되나, 내가 보기에도 부족한 걸 자꾸 갖다 주면 어느 날 짜증내는 것 아닐까 하고 불안해하곤 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이는 그 사람의 일하는 태도였다. 1년여쯤 지나서, 그는 나를 승진시키고 싶다며 내 승진 케이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나 웃으며 내가 편안히 일할 수 있도록 도왔다. 덕분에 나는 내가 더 잘하는 일, 분석과 기술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당시엔 챗GPT가 없었기에 서투른 영어 표현이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누군가가 그걸 보고 오해하거나 비웃을까 걱정이 많았고, 그것에 낭비하는 에너지가 무척 컸기에, 영어 문법에 신경을 덜 쓰고 내용의 핵심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었다.

모든 상사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또 다른 상사는 일하는 스타일이 많이 달랐다. 그는 주로 피드백 주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일을 해서 가져가면, 주로 지적을 했다. 이걸 이렇게 고치면 좋겠다 저렇게 고치면 좋겠다 등. 문제는 그 표현이 좀 애매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긴장해서 노트에 적고 단어 한 마디라도 놓칠까 하여 생겨들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들을 때는 다 이해가 되는 것 같았고 방향이 보였는데, 돌아와서 자리에 앉아 수정하려고 하면 그 개념이 한없이 두루뭉실해지고 갈피를 못 잡겠는거다. 이건 분명 내 실력이 부족해서, 특히 내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일 것 라고 생각해며 들었던 말을 곱씹어 생각해보고, 내가 필기했던 것을 한참 들여다봤지만, 여전히 명확하게 개념이 잡히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렇게 머리를 끙끙 싸매고 작업을 해서 다음날, 또는 그 다음날 가져가면 수고했다면서 또 피드백을 왕창 주었다. 그 두 번째 피드백을 받으며 내가 한 생각은 두 가지.

  1. 나는 바보다. 분명 첫 번째 피드백에 이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내가 놓쳤었구나. 귀한 상사의 시간을 빼앗았으니 나는 분명 안좋은 평가를 받게 되거나, 이것이 반복되면 해고될지도 모른다.
  2. 방향이 바뀌었다. 지난번에는 언급한 적 없는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추가됐다. 또 재작업이구나. 재작업해서 가져가면 또 새로운 피드백을 주겠지. 대체 이 프로젝트는 언제 끝이 날까.

그 사람은 분명 똑똑한 사람이었고, 말도 잘했고 아이디어도 많았고 회사에서 지위도 높았기에, 나는 그 사람의 방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든 그의 맘에 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자꾸 좌절감이 들 때가 많았고, 내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그러던 와중, 제대로 좌절하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나에게 어떤 주제에 대해 슬라이드 덱을 만들라고 시켜서(알고 보니 내 상사의 상사에게 발표하는 내용이었다), 그 주제에 대해 열심히 조사해서 만들었는데, 회의 시간에 그 슬라이드를 화면에 공유하라고 했다. 거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슬라이드를 한 장 한 장 넘기자 매 페이지마다 일일이 피드백을 주기 시작했다. 글자 크기를 줄여라, 여기 표현이 좀 이상하니 다시 써봐라, 여기 이 슬라이드를 추가하면 어떠냐 등등등.. 높은 사람 앞에서 발표하기 전에 팀 모두가 힘을 합쳐 완성도를 높이자는 취지였지만, 그 슬라이드의 글자 크기, 디자인 등에 대해 일일이 지적하는 내용들을 사람들 앞에서 고치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다. 어질어질한 상태로 돌아와 회의 시간에 들었던 피드백을 하나씩 반영했는데, 나는 어쩌다 이렇게 먹이 사슬의 하위로 들어와 시간 낭비를 하고 있나 싶어서 정말 좌절했다.

2015년, 내 회사를 창업했다. 스타트업 창업자가 의례 그래야 하지만, 그래도 내가 더 애써서 했던 것은 ‘사람들에게 마무리를 시키지 않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뽑은 첫 엔지니어가 ‘워렌 Warren’이었는데, 그 옆에 앉아 내가 주로 했던 일은 그가 일을 80%까지만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너무 귀한 엔지니어였기에 그가 일하다가 내가 예전에 느꼈던 그 좌절감을 느끼게 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주 썼던 말은 “I’ll take it from here (여기부턴 내가 책임질게).” 였다. 워렌은 신나서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가져왔고, 이를 제품에 적용했다. 고객들에게 바로 전달될 수 있을 정도의 완성도는 아니었지만, 내가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것이라면 최대한 내가 커버했다. 그렇게 하다보니 그는 엔지니어로서 더 재미있는, 그리고 더 도전적인 일들을 맡을 수 있었고, 나는 그 옆에서 최대한 뒤치닥거리를 하며, 그리고 제품의 마감질을 담당하며 창업자로서 굉장한 보람을 느꼈다. 일도 재미있었고 진행도 빨랐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창업 초기에 어떻게 돈을 많이 안쓰고도 제품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느냐 묻는데, 나는 그것이 비결이었다고 생각한다. 워렌은 공동창업자가 아니었기에, 하는 일이 재미 없으면 언제든 다른 회사로 이직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내가 그를 붙잡아두고 함께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은, 그가 자신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재미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수년이 지나 이제 차트메트릭은 50여명이 함께 일하는 회사가 되었고, 워렌은 와이콤비네이터(Y Combinator)의 투자를 받은 자신만의 회사를 창업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리더십의 원칙은 지금도 고수하고 있다. 즉, 차트메트릭의 중간관리자들은 아래 사람들에게 끝없이 피드백을 주지 않는다. 코드 리뷰(code review)도 하고, 일을 맡긴 후에 몇 가지 피드백을 주어서 일의 완성도를 높이는 일들은 물론 있지만, 피드백이 너무 많아진다는 생각이 들거나, 피드백 주고 받고 할 시간에 이미 일이 끝났겠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그 관리자에게 한 마디를 던지곤 한다. “How about you take it over and fix it yourself? (그냥 일을 넘겨 받아서 직접 고치면 어때요?”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잘 주고, 개개인들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리더십도 물론 필요하지만, 피드백 루프가 길어진다 싶고 그 과정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일을 가져와서 직접 처리할 수 있는 리더를 나는 더 훌륭히 평가한다. 그런 리더들이 많은 회사의 장점은, 그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동안 나도 CEO로서 한없이 일을 가져와서 직접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뭐 이런 일까지 대표가 처리하나 싶은 일도 직접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다 보니 내 일정이 너무 가득 차서, 그리고 위임을 잘 해야 앞으로 회사가 더 성장할 수 있겠다 싶어서 이제는 적극적으로 위임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내가 지양하는 것은 너무 디테일한 피드백이다. 나도 어떨 때는 내 생각을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마법처럼 내 머리 속에 들어와 내 의향을 모두 파악해서 실행하길 기대하겠는가. 그런 피드백을 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 “여기서부터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예전에 블로그에 스티브 잡스의 인터뷰 하나를 정리해서 큰 공감을 얻었던 적이 있다.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스스로를 관리합니다“라는 제목이었는데, 그가 인터뷰에서 했던 마지막 말을 다시 인용해보면 아래와 같다.

They knew how to manage, but they didn’t know how to do anything! And so, if you are a great person, why do you wanna work for someone who can’t learn from it? You know who the best managers are? They are the great individual contributors who never ever want to be a manager. But decided they have to be a manager, because no one else is gonna be able to do as good a job as them.

그들은 사람들을 관리할 줄만 알았지, 할 줄 아는 게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신이 정말 뛰어난 사람이라면, 배울 게 없는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겠습니까? (깨달았다는 듯이) 누가 가장 뛰어난 매니저인 줄 알아요? 절대 매니저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 전문가입니다. 본인이 가장 일을 잘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만큼 일을 잘해낼 수 없기 때문에 관리자가 됩니다.

위 표현은 좀 극단적이지만, 나는 스티브 잡스가 왜 이렇게 극단적인 입장까지 취하면서 열변을 토했는지 알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훌륭한 리더는,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고, 그들이 가장 빛이 날 수 있는 일을 주고, 그들이 일을 통해 가장 빨리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다. 일의 결과가 자신의 맘에 쏙 들 때까지 끝없이 피드백을 주며 다시 해오라고 시키는 리더는 그 아래 사람들을 ChatGPT 보다 못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리더십. “이게 최선입니까?” (물론 현빈은 좋아합니다)

자, 오늘부터 시도해 보자. “I will take it from here.”

3 thoughts on “I’ll take it from here (여기서부터는 제가 할게요)

  1. 회사생활에 매우 공감되는 글입니다. 지금은 팀원으로 있지만 훗날 팀장이 되어도 “i’ll take if from here”을 기억하겠습니다.

  2. 한동안 머리보다 마음이 복잡했는데, 풀어나가는데 좋은 실마리가 될 것 같아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세요!

  3. I will take it from here

    그 모든 걸 내가 다 했다는 듯 사람들에게 말했다

    진정한 리더쉽이네요 ~!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