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빌(현 컴투스홀딩스)에 다니던 시절의 일이다. 약 20여명 남짓 되는 크기의 회사에서 나의 역할은 개발실장이었다. 개발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게임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즈음, 새로운 사람이 한 명 회사에 들어왔다. 그의 직책은 ‘마케팅실장’. 무척 똑똑해보이는 인상을 가졌고, 실제로 똑똑했다.
하지만 나를 감탄하게 한 건 그의 똑똑함이 아니었다. 그의 기억력이었다. 그는 숫자를 참 잘 기억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숫자를 꽤 정확하게 떠올리는 능력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랬다. “유저 증가율이 이번달에 20%라고 하는데, 지난달에는 24% 아니었던가요? 4%정도 감소한 원인이 뭐죠?” 또는 이랬다. “마케팅팀에서 2400만원 예산 집행을 해서 15%의 유저 증가가 있었구요, 지난번 1800만원을 집행했을 때에 비해 두 배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나를 감탄하게 한 일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리고 그 때마다, 그렇게 기억력이 높은 사람 아래에서 일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얼마나 긴장을 하게 될까 생각했다. 실제로 마케팅실은 그렇게 기억력이 좋은 ‘똑똑한’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고, 회사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었다. 특히 회의 진행이 효율적이었다. 일반적인 회사에서 회의 시간에 누가 뭔가를 질문하면, “아, 그건 지금 제가 기억이 안나는데,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고 보고드리겠습니다.” 라고 반응하는 경우가 참 많다. 사실 그 중 절반은 말만 하고 실제 보고하지도 않고, 또 절반은 질문을 한 사람이 질문한 사실을 잊어버려서 그냥 지나가버리기가 일쑤다. 그렇지만 그가 있는 회의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즉시 숫자를 대답했고, 바로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즉시 그 숫자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서 대답하고는 했다. 의사 결정이 훨씬 빠르고 효율적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전형적인 이과 성향이었던 나는, 학창 시절에 항상 원리를 바탕으로 한 수학과 과학은 자신이 있었지만, 역사, 지리, 사회, 도덕 등의 ‘암기’를 기반으로 한 과목에는 약했다. 그래서 나에게 ‘기억력’은 우선순위가 아니었고, 암기력이 좀 부족해도 논리가 강하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마케팅실장의 기억력은 나를 감탄케 했고, 그 또한 나와 같은 전공인 ‘이과’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나는 ‘이과이기 때문에’ 라는 핑계거리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 때부터 연습하기 시작했다. 숫자를 외우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내가 지시한 일들을 기억하는 연습을 했다. 기억력과 암기력이 원래 나쁘다고 생각했던 나이지만, 계속 훈련을 하다보니, 그리고 그 훈련을 20년 이상 해오다보니, 이제 구체적인 내용을 꽤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회사 인수 금액 등 중요한 숫자들을 꽤나 정확하게 기억해서 시간이 지나도 쉽게 떠올려서 언급할 수 있게 되면 뿌듯함을 느낀다.
스타트업을 시작하고, 회사를 운영하게 되면서, 그 때부터 연습해온 ‘기억하는 능력’ 덕에 시간을 아끼고, 일을 빠르게 진행시키고,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러면서, 좋은 기억력이 모든 리더에게 꼭 필요한, 그리고 필요함을 넘어서 매우 필수적인 자질이라고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상사가 하는 최악의 행동 중 하나는, 직원에게 일을 시켜놓고, 조사를 시켜놓고 자기가 잊어버리는 것이다. 처음엔 직원이 열심히 그 일을 한다. 그래서 결과를 보고한다. 그 사이에 상사가 이내 지시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알면 힘이 다 빠진다. 그 다음에 상사가 또 일을 시킨다. 이번엔 대충 한다. 어차피 시간 조금 지나면 잊어버릴 것이므로. 어떤 경우엔 아예 일을 하지도 않고 시간이 좀 지나 상사가 지시한 내용을 잊어버리기만을 기다리기도 한다. 이런 회사에서 중요한 일들이 착착 진행될 수 있을까?
이렇게 기억력이 나쁜 (또는 기억을 굳이 하려고 하지 않는) 상사가 하는 또 하나의 행동이 있다. 바로 부하직원 또는 비서에게 ‘메모’를 시키는 것이다. 직원은 그러면 필기 로봇이 된다. 비참한 일이다. 필기는 하지만 권한은 없다. 그가 하는 일은 필기한 내용을 상사에게 보내거나 (그러면 기억력이 나쁜 상사는 또 대충 읽고 넘긴다), 필기한 내용을 바탕으로 회의록을 정리해서 다른 부서와 공유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그렇게 어떤 직원이 보낸 회의록을 진지하게 대한 경험이 있는지. 상사가 직접 정리해서 공유한 내용이 아니면, 또는 상사가 그 회의 시간에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적어도 다음 2주 동안에) 기억하지 않는다면, 회의록에 있는 내용의 90%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잊혀지고, 장시간 회의에 소모한 시간은 점차 무의미해져가고 만다. 그리고 나서 다음 회의에 또 똑같은 내용을 다룬다. 그리고 그 내용의 90%는 다시 잊혀져간다.
지금부터 연습해보자. 기억력은 선천적인 능력이라 어느 정도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긴 하지만, 얼마든 훈련에 의해, 그리고 도구의 도움을 받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꾸준히 연습하면, 언젠가 자신의 기억력에 감탄하는 날이 올 것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도 사실 자신이 있는 영역은 아니다. 매우 외향적인 성격 탓에 만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몇년 전에 만났던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너무 죄송하고 민망한 일이지만 – 이것도 좀 더 훈련을 통해 향상시켜보려 하고 있다.)
참고로, 그 당시 나를 감탄하게 했던 사람은 송재준이고, 1500명의 직원을 가진 (주) 컴투스의 대표이사역을 약 2년간 맡으며 코인원, 위지윅스튜디오 등 굵직한 투자들을 결정해 큰 성과를 낸 후 2023년 3월에는 ‘글로벌 최고 투자 책임자’ 역할로 전향했다. 또한 초기 단계 스타트업 투자사인 크릿벤처스의 설립자이자 대표이기도 하다. 아래 인터뷰 글에서 그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CEO&STORY] 송재준 컴투스 대표 “콘텐츠와 블록체인 투자 연계…’컴투버스’의 가치는 무한대” – 서울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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