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와 컴퓨터

영어와 컴퓨터
Drawing by Haken45

1990년 2월. 서울의 한 초등학교. 6학년 졸업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우리는 이제 이 곳과는 이별이라는 생각, 그리고 옆에 있는 많은 친구들과 헤어져야만 한다는 아쉬움과, ‘중학교’라는 새로운 장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그리고 ‘중학생’이 되면 우리도 이제 전보다는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더 이상 시험은 없었다. 며칠간 학교에 나와 가벼운 마음으로 수업을 듣고, 선생님과 인사하고, 친구들과 인사하고, 졸업식을 치른 뒤 집에 가면 신나는 방학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세 시쯤 되었을까. 평소에는 월요일 조회 시간에 교단 위에서만 볼 수 있었던 교장 선생님이 예고 없이 갑자기 교실에 등장했다. ‘담임선생님 대신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러 오신 걸까? 교장 선생님도 수업을 하실 수 있나?’하는 의아함으로 우리는 앞에 양복을 입고 선 그 분을 쳐다보았다.

학생 여러분, 오늘 두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에 왔습니다. 딱 두 가지입니다. 여러분이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는 지금 시점에서, 지금까지 배웠던 것은 잊어버려도 좋은데 이 두 가지만은 꼭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첫째, 오늘부터 집에 가면 이렇게 해보세요. 저녁을 먹고, 휴식을 한 후, 운동도 하고 TV도 보고 나서 책상에 앉아보세요.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지는 마세요. 그냥 5분만 책상에 앉아 있다가 내려오세요. 오늘 할 일은 그걸로 끝입니다. 내일 학교에 왔다가 집에 가서, 똑같이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한 후 책상에 10분간 앉아보세요. 마찬가지로 책을 읽지는 말구요. 그 다음날은 30분간 책상에 앉아 보세요. 그 때 책을 읽어도 좋고 그림 그리기를 해도 좋아요. 네번째 날, 책상에 앉거든 책을 한 권 꺼내세요. 그리고 읽어보세요. 그 다섯 번째 날에는 좋아하는 과목으로 풀고 싶은 문제집을 선택해 보세요. 그리고 한 시간동안 앉아서 풀어보세요.

집에 가서 하루에 몇 시간을 숙제하느라 책상에 앉아 있곤 하던 나에게 교장선생님의 말씀은 꿀맛처럼 들렸다. ‘오늘은 이 핑계로 5분만 책상에 앉아 있으면 되겠다!’ 그리고 그 말대로 해보았다. 하루에 5분만 책상에 앉고 나머지 시간을 놀면서 보내고 나니 이내 지루해져 이틀째부터 책을 집어 들고 말았지만.

둘째, 이제 10년 후면 20세기가 지나고 21세기가 됩니다. 학업을 마치고 여러분들이 나가서 살게 될 세상은 21세기이며, 21세기는 새로운 인재와 새로운 기술을 요구할 것입니다. 21세기에 대처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무엇일까요? 한 가지는 영어입니다. 세계가 더 많이 연결될수록, 영어의 중요성은 더 커질 것입니다. 영어를 꼭 마스터하세요. 두 번째는 컴퓨터입니다. 컴퓨터 언어를 배워두세요. 컴퓨터가 지금보다 더 많이 쓰이고, 컴퓨터 없이는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중학교에 진학하고, 대학교에 가서도 이 두 가지를 기억하세요. 영어와 컴퓨터.

30분의 짧은 강의였지만, 그 때 교장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마음에 강렬하게 남았다. ‘앞으로 내가 살게 될 세상은 영어와 컴퓨터가 중요하겠구나.’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미국에 살며 매일 동료들과 영어로 회의하며,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며, 인터넷과 모바일 혁신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세상을 보고 있다.

그 분의 성함은 조성선이다. 나와 이름이 비슷해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7년 전쯤, 버스 타고 가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 찾아본 적이 있었다. ‘디지털 교장선생님’으로 불리고, 컴퓨터 관련 서적만 10권이 넘게 출간했다는 2002년의 중앙일보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관악구의 미성 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시며, 한국의 자연을 사진에 담는 취미 활동을 하고 계셨다. 미성초등학교 홈페이지를 찾아가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그 당시 초등학교 6학년 때 교장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 때 말씀대로 영어와 컴퓨터 두 가지를 공부했고, 지금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수출하는 게임을 만들고 있다고.

연락 고맙습니다. 멋진 삶을 살기를 바래요.

짧은 답장이 달렸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연락한건데 답장이 너무 짧아 좀 아쉽기도 했지만, 그동안 재직했던 초등학교를 통해 배출한 학생들이 얼마나 많을텐데 일일이 답장하기 힘드시겠구나’라는 생각도 했다.

지금, 졸업하는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에게 10년, 20년 후를 대비해서 두 가지를 꼭 익히라고 말한다면 무엇이어야 할까?

눔(Noom) 다이어트 코치 한국 진출, 그리고 정세주 대표

지금으로부터 약 3년 전인 2009년 11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오픈 모바일 서밋(Open Mobile Summit)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스마트폰 혁명이 시작된 시기였고, 아이폰 앱스토어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앞으로의 이통사와 제조사가 담당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우리 회사에서 스폰서를 한 덕분에 티켓이 생겨 이 행사에 참석했다. AT&T, 스프린트 등의 이통사에서 임원들이 나와 향후 전략을 이야기했고, 한국에서는 LG 전자를 대표해 최진성 현 SKT 기술전략실장이 스피커로 참석했었다. 앞으로 위치 정보를 비롯한 고객 정보를 이동통신사가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등을 이야기하는 한 세션에 참석했는데, 세션이 끝날 즈음 뒤에 앉은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자신을 전에 구글에 일했던 엔지니어라고 소개하며, 현재 건강에 관련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세션이 끝나고 나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어떤 앱을 만들었는지 궁금해서 좀 보여줄 수 있겠냐고 했더니, 아직은 완성이 안 되었지만 기능은 대부분 갖추었다며 보여주었다. 당시엔 아직 인기가 많지 않았던 안드로이드 기반의 애플리케이션이었다. 손에 받아 이것 저것 눌러보며 살펴보았다. ‘카디오 트레이너‘. 조깅할 때 이 앱을 켜고 달리면 GPS로 위치를 추척해서 기록하고, 그 기록들을 비교할 수 있게 해주어 동기부여가 되도록 하는 앱이었다. 게임빌에서 있을 때 7년간 모바일 게임을 만들어본 터라, 보자마자 관심이 갔다. 아주 괜찮아 보였다. 조금 더 이야기하고, 명함을 주고 받았다.

Artem Petakov (아텀 페타코프)
CTO/Founder
Worksmart Labs, Inc (주식회사 워크스마트랩)

워크스마트랩이라, 더 똑똑하게 일하는 법을 연구하는 회사? 재미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슨 기업 연구소도 아닌데 회사 이름을 왜 ‘Lab’이라고 지었을까?

집에 도착해서 컨퍼런스 때 받았던 명함을 쭉 정리하다가 Artem의 명함이 눈에 들어왔다. Worksmart Labs. 더 알고 싶어져 회사 웹사이트를 찾아 들어가 보았다. 그리고, ‘About Us‘ 페이지를 살펴보았다. 제일 첫 줄에 CEO로 소개된 Saeju Jeong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어랏, 한국 사람이네? 프로필을 읽어보니 홍익대학교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고 되어 있었다. 이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Artem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만나서 반갑다는 말과 함께, 정세주씨를 소개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나서 링크드인(LinkedIn)에서 정세주씨 프로필을 찾아보았다. 간략한 내 소개를 하며 연결을 요청했다.

불과 몇 시간만에 그로부터 답장이 왔다.

안녕하십니까? 조성문님

먼저 찾아주시고 또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Artem과 WorkSmart를 공동 창업한 “정세주”라고 합니다. Artem이 내일 뉴욕으로 돌아오면 더 자세한 소식을 듣겠습니다만 반가운 인연입니다. 원대한 꿈을 가지고 창업을 했고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혹시 뉴욕이나 동부에 오실 일정이 있으시면 저희 연구소를 들려주세요, 요리사가 준비해주시는 음식이 제법 맛있습니다. 게임빌의 성공사례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더 넓은 길을 향해 가시는 조성문님을 더욱 알고 싶습니다. 현재 우리 연구소에서는 멋진 연구원들을 리쿠르팅 하고 있습니다. 혹시 추천 해주실만한 분이 계시면 말씀 주십시오.
우리 연구소에서는 건강관련(피트니스, 웰니스, 무선 헬스정보망) 사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조언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 편히 주십시오. 모든 인연을 감사히 여기며 인재에 정성을 기울이려 노력합니다. 아래는 제 연락처 정보 입니다.
말씀 주셔서 감사하며 또 만나뵙기를 기대합니다.
건강하십시오!
뉴욕에서 정세주 올림
WorkSmart Labs, Inc.

그리고 나서 몇 번 더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마침 뉴욕에서 장기 출장중이던 김현유(미키김)씨와 만나보면 어떻겠냐고 소개를 했고, 또 투자를 유치중이라면 아는 투자자들에게 소개해주고 싶다고, 그리고 나도 투자에 관심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곧 다시 답장이 왔다.

실례가 안된다면 전화상으로 제 소개를 함은 어떨런지요, 많이 바쁘신 분이라 제가 괜히 부담이 되는 질문을 하나 싶습니다만 저희의 순수한 열정을 보신 것 같아 저 또한 조성문님을 가까이 알고 지내고 싶습니다. 제 핸드폰은 000-000-0000 입니다. 이번 Open Mobile Summit 에서 Artem이 꽤나 즐거운 일들을 만든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 제가 픽업을 하고나면 더 자세한 소식을 듣겠습니다만 잘하면 실리콘 벨리쪽에 있는 회사와도 연계 업무가 가능해보입니다.

그렇게 해서 전화로 처음 만났다. 1시간 정도 통화를 하며 서로에 대해 알게 되었다. 미국 서부와 동부에 떨어져 있기에 만날 수는 없었지만, 언젠가 꼭 만나 이야기를 하자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약 한 달 뒤인 12월, 서울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난 휴가를 내어 서울의 가족을 방문하러 갔고, 그도 마침 출장으로 서울에 있을 때였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무척 강한 인상을 받았다. 상대방의 말에 최대한 집중하고, 그 시간에 최선을 다 하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달이 다시 지난 2010년 2월 말, 샌프란시스코의 투자자를 만나러 출장 온 그를 다시 만났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브릿지 근처를 걷고, 샌프란시스코 서쪽의 Cliff House에서 만나 식사를 하며 와인과 함께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뉴욕에 가서 사업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다시 출발한 이야기는 신문 기사를 통해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암으로 일찍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 아버지와의 추억을 자세히 듣게 된 것은 이 때였다.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지혜를 작은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해주셨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와닿았다.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 그는 감상에 젖는다. 그리고 눈물을 흘린다. 지난 1월 11일, 강연 100도씨에 출연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하던 그는 또 다시 아버지의 죽음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세 달이 지난 2010년 5월, 이번에는 뉴욕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할렘가에 있는 한 아파트를 개조해서 쓰고 있는 사무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사무실에서 일하던 Artem을 오랜만에 다시 만났고, Vera, Charlie, Mark, Ketill을 만나 인사를 했다. 모두 정세주를 마음 깊이 좋아하고 신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뉴욕에서
뉴욕 워크스마트랩 사무실에서, Mark, Charlie, Saeju, & Vera. 제일 왼쪽의 마크는 장애로 인해 손발을 잘 움직이지 못하지만, 로봇 축구 챔피언십을 두 번 우승한 경력이 있다.

그리고 그 해 10월, 그는 나에게 회사에 투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나는 당연히 참여했다. 그 후, 카디오 트레이너(Cardio Trainer) Pro 버전($9.99)이 출시되며 매출이 크게 성장했고, 제품이 포브스(Forbes) 지에 언급되었고, 2010년 말에는 뉴욕타임즈에서 Top 10 안드로이드 앱 중의 하나로 선정되었고, Google Health와 파트너십을 맺었고, 뉴욕 첼시(Chelsea)로 사무실을 옮겼다.

2011년 4월에는 클라너 퍼킨스(KPBC)에서 투자를 받았고, 5월에는 눔 다이어트 코치(Noom Weight Loss)를 출시했으며, 출시 한 달만에 백만 건의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SBS 스페셜에서 그가 일하는 모습을 취재한 방송이 나갔다. 그리고 그 해 11월, 회사 이름을 WorkSmartLabs에서 Noom으로 바꾸었다.

2012년에는  눔 다이어트 코치가 크게 개선되었으며, 한국 본격 진출을 위해 모든 컨텐트의 한글화 작업을 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 퀄컴 벤처스, 하버 퍼시픽 캐피털 등으로부터 30억원의 투자를 받았다.

2013년 1월에는 눔(Noom) 다이어트 코치 한글 버전이 출시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긍정적인 리뷰를 보니 순조로운 출발로 보인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행운을 얻었다.

눔(Noom) 다이어트 코치 안드로이드 스토어 사용자 평점
눔(Noom) 다이어트 코치 안드로이드 스토어 사용자 평점

아쉽게도 아직 아이폰 버전이 없어 나는 자주 사용하고 있지는 못하지만(이것 때문에 안드로이드 폰을 하나 사기는 했다), 그동안 내가 써본 트래킹 앱 중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카카오톡이나 모바일게임과 같이 바이럴한 제품도, 1분 후에 점수가 나오는 것처럼 결과를 빨리 볼 수 있는 제품도 아닙니다. 애플리케이션의 완성도에 집중하는 이유입니다.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했던 말이다. 참으로, 눔 다이어트 코치와 카디오 트레이너를 써보면 세심함과 완성도에 감탄하게 된다. 청년 사업가 정세주, 그리고 그의 회사 눔(Noom)이 앞으로 만들어갈 이야기가 기대된다.

참고 기사

게임 중독에 빠졌던 내 어린 시절

내가 게임을 처음 접하게 된 건 초등학교 저학년 때, 동네 오락실을 통해서였다. 보글보글(Bubble Bubble), 너구리, 그리고 시티 커넥션(City Connection) 등을 했었다 (시티 커넥션의 배경음악으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쓰이는데, 그 음악이 좋아 한동안 차이코프스키를 좋아했었다). 동생은 운동을 즐겨서 시간 나면 밖에 나가 친구들과 야구를 했지만, 나는 시간만 나면 무조건 오락실로 향했다. 한 판에 20원, 30원, 50원 하는 그 게임들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게임, 보글보글 (Bubble Bubble)

오락실에서 몇 시간이고 눈이 빨개지도록 정신 팔려 있으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내가 거기 있는 것을 알고 찾아왔고, 집에 가면 눈물이 나도록 혼이 났다. 그래도 소용 없었다. 눈만 감으면 캐릭터들이 나타나 머리속에 빙빙 돌았기 때문에 나는 다음 날이면 또 오락실에 가야 했다.

나는 그렇게 게임에 중독되었다. 하루에 백원밖에 안되는 용돈으로는 두세 판 하고 나면 끝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동네 공사장이나 들판을 돌아다니며 빈 병을 주웠다. 한시간 노동으로 수십 병을 수퍼마켓에 가져다 주면 몇십 원을 벌 수 있었다. 그걸로 곧장 친구들과 오락실로 향했다.

돈이 떨어지고, 병 줍기도 시들해지자 나는 집 안에 보이는 돈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식탁이든, 화장대이든 천원 짜리가 보이면 그걸 주워 오락실로 향했다. 그것이 도둑질이라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초등학교 저학년에 게임을 하기 위해 돈을 훔치는 나를, 어머니는 어떤 심정으로 보고 계셨을까? 그 돈을 가져가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가 와서 슬픈 표정을 하고 나를 가만히 보고 계셨다. 난 엄청나게 혼이 날 각오를 하고, 그리고 아버지에게 매 맞을 각오를 하고 집에 돌아갔다. 웬일인지 나를 혼내는 대신 어머니는 그냥 우셨다. 우는 어머니를 달래며 아버지가 나에게 차분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것이 얼마나 나쁜 짓인가를. 왜 내가 그 중독에서 벗어나야 하는가를.

그 후로 다시는 집에 있는 돈을 가져가지 않았다. 하지만, 게임을 그만두는 대신 나는 아버지를 설득하기로 했다. 게임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그리고 창의적인 놀이인지를 알면 어쩌면 아버지랑 같이 게임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버지와 함께 오락실에 갔다. 그런 게임을 처음 보는 듯 아버지는 미소를 띠고 신기해하며 내가 게임하는 것을 보셨다. 아버지가 관심을 보이자 난 신이 나서 게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게임의 목적이 무엇인지, 한 스테이지를 달성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이템을 먹으면 어떤 새로운 능력이 생기는 지 등을 말이다. 그리고 한 번 해보시라고 권하며 자리를 드렸다. 아버지는 결국 게임을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30분 후에 나는 적어도 뿌듯하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만 알고 있는, 내가 빠져 있는 이 세계를 아버지도 이제 조금은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게임이 무조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시면 가서 게임을 하라고 돈을 주시지 않을까? 사실 게임을 하러 갈 때마다 부모님이 싫어하는 일을 한다는 죄책감이 마음 가득했는데, 적어도 아버지에게 그 세계를 보여드리고, 아버지가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느끼게 되자 죄책감이 사라졌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로 적어도 시간을 조절하는 능력이 생겼다. 게임을 하고 싶으면 당당하게 아버지에게 물어봤고, 아버지와 일종의 ‘딜’을 했다. 내가 착한 일을 했거나, 숙제를 다 해놓았다는 것을 증명한 후에 30분에서 1시간 정도의 자유 시간과 함께 약간의 용돈을 받아 오락실에 갔다 왔다. 그 시간에 오락실에 가 있다는 것을 부모님이 아셨기 때문에 돈을 다 쓰거나 시간이 초과되면 바로 중단하고 집에 돌아왔다.

이듬 해가 되자, 친구들이 게임기를 소유하기 시작했다. 당시 ‘재믹스’라는 게임기가 인기 있었다. 난 친구 집에 놀러간다고 이야기하고 가서 게임을 한없이 하기 시작했다. 이제 용돈을 받지 않아도 되었고, 오락실에서 내 차례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곧, 우리 집에도 게임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부모님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부모님은 내가 아무리 졸라도 쉽게 허락해주지 않았다. 난 결국 틈이 나면 친구네 집에 가서 게임을 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게임은 ‘왕가의 계곡’이었다.

재믹스로 즐겨 했던 게임, '왕가의 계곡 (King's Valley)'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서도 게임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나를, 어머니는 수년간 어찌하지를 못한 채 안타까워하고 계셨다. 그 때였다. 어머니가 그 문제를 상담하기 위해 내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신 것은. 내 담임선생님은, 한가지 해결책을 어머니에게 제시해 주셨다 (이 사실은 한참 후에 들어서 알았다).

“컴퓨터 학원에 등록시켜 보세요.”

당시 피아노 학원, 미술 학원과 더불어 유행처럼 컴퓨터 학원이 동네에 많이 생겼다. 어머니는 담임선생님의 말을 믿고 나를 컴퓨터 학원에 데려가셨다. 한 달에 몇 만원이나 하는 학원비가 가볍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컴퓨터 학원에 처음 들어갔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방 안에 신기한 물건이 가득했다. 녹색 모니터에 영어 글자와 숫자들이 잔뜩 떠 있었는데, 하나 하나가 나를 기다리는 선물 상자처럼 느껴졌다. 여기 저기 ‘컴퓨터 베이직(BASIC)’이라는 책이 보였다. 들쳐보니 ‘삼각 함수’라며 사인, 코사인 함수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는데 (물론 그 때는 그게 뭔지 전혀 몰랐다), 그것을 이용해 다양한 그래프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게 느껴졌다. 변수, 함수, 배열, .. 이런 새로운 용어들도 너무 새로웠고, 나는 곧 컴퓨터라는 새로운 장난감에 극도로 호기심이 생겼다. 어머니는 ‘베이직 3개월 완성’ 과정을 등록해 주셨다.

그렇게 BASIC이라는 컴퓨터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너무나 재미있었다. 게임 대신 나는 프로그래밍에 중독되었고, 그러면서 어머니의 걱정도 사라져갔다. 6개월쯤 배워서 컴퓨터에 뭔가 ‘명령’을 시킬 수 있게 되고 나자, 나는 뭔가를 직접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 당시 학원에서 가장 실력이 좋던 친구가 자기가 만든 게임이라며 나에게 슈팅 게임을 보여주었는데, 그걸 보니 질투도 났고, 나도 해보고 싶었고, 나도 못할 리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친구가 만든 소스 코드를 보여달라고 졸랐다. 다는 보여주지 않았지만, 적어도 ‘방향 키 또는 스페이스 바를 입력했을 때 그 키를 처리해서 왼쪽, 오른쪽, 위, 아래로 캐릭터가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코드’는 보여주었다. 난 그 코드를 참고해서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빠져서 며칠이 지나, 난 나만의 ‘슈팅 게임’을 완성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래와 같이 아주 단순한 게임이었다.

베이직(Basic)으로 만든 슈팅 게임

이 게임을 완성하고 나서 친구들에게, 동생에게, 그리고 부모님에게 보여주며 얼마나 뿌듯해했는지 모른다. 랜덤하게 위쪽에서 적들이 등장하고, 내가 미사일을 쏘아 맞추면 하나씩 사라졌다. 그리고 한 대 맞을 때마다 점수가 올라갔다. 적들도 나에게 미사일을 쏘았다. 가끔 그래픽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거나 총을 쏴도 맞지 않는 등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오락실에서 남이 만든 게임만을 하다가, 내가 직접 게임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집에 컴퓨터가 필요했다. 더 알고 싶었고 더 배우고 싶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 컴퓨터를 사달라고 졸랐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아마 컴퓨터를 사 주면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이라고 약속했던 듯 하다. 아버지는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72만원을 들여 컴퓨터를 사 오셨다. 내가 바란 것은 MSX-II 라는, 칼라 화면에 게임 팩만 꽂으면 곧바로 게임을 시작할 수 있는, 당시 친구들이 많이 가지고 있었던 컴퓨터였지만, 아버지는 MSX-II는 게임기에 가깝고, 진짜 컴퓨터라고 볼 수 없다는 동료의 말을 듣고, 못생긴데다 흑백 모니터였고 게임 팩 대신 5.25인치 플로피 디스켓을 꽂아야 하는 IBM XT라는 컴퓨터를 사오셨다. 그게 더 ‘오래 쓸 수 있는’ 것이라면서.

나의 첫 번째 컴퓨터, IBM XT (출처: Wikipedia)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어쨌든 나만의 컴퓨터가 생긴 것이다! 컴퓨터를 자유 자재로 다루고 싶어 MS-DOS (당시의 운영체제) 책을 샀고, 두꺼운 BASIC 프로그래밍 책도 샀다. MS-DOS 책은 맨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을 봤고, 거기 있는 명령어를 거의 다 익혔다. 파일을 복사하고, 디렉토리를 만들고, 텍스트 파일을 편집하고, 파일의 속성을 변경하는 기본 적인 것들 뿐 아니라, 심지어 가상 디스크를 만드는 일까지. 그리고 BASIC 프로그래밍 책에 담긴 예제를 따라서 쳐 보며 프로그램도 이것 저것 만들어 보았다. 지금처럼 그냥 코드를 복사해서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수십 페이지나 되는 코드를 한 글자 한 글자 타이핑해야 했는데, 많은 경우 바로 작동하지 않고 에러가 나서 (원래 코드에 실수가 있었거나 내가 타이핑을 잘못 한 경우이다) 이를 고치느라 시간을 많이 소비하곤 했다.

또 한편, XT 컴퓨터용 게임을 즐기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살 때 같이 왔던 게임은 ‘캘리포니아 게임즈(California Games)’였다. 제기 차기, 서핑 등 스포츠 게임이 여러 종류 들어있었는데, 너무나 재미있어서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아마 그 때 캘리포니아에 대한 환상이 처음 생겼던 듯하다). 하지만 곧 싫증나서 다른 게임을 하고 싶어졌고, 컴퓨터를 가진 다른 친구들로부터 게임을 복사하기 시작했다. 디스크를 통째로 복사해야 했는데, 복사가 금지되어있는 경우가 많아 이를 우회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하면서 점차 소프트웨어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었다. 때로는 능력치를 올리거나 적들을 약하게 하기 위해 수치를 조정하기도 했다. 흔히 쓰는 방법은 ‘세이브 파일’을 조작하는 것이다. 먼저 게임을 시작한 후 게임을 저장한다. 그리고 저장되어있는 정보를 PC Tools라는 소프웨어를 사용해서 접근하고, 능력치가 기록된 곳에 가서 숫자를 바꾼 후 저장한다 (컴퓨터는 2비트, 16비트를 사용하므로, 보통 숫자를 FFFF로 바꾸면 능력치나 체력이 최고치로 올라가곤 했다).

피씨 툴즈 (PC Tools) 실행화면

당시 야구 게임인 ‘하드볼’, 그리고 자동차 운전 게임인 ‘테스트 드라이브‘ 등을 정말 재미있게 했던 기억이 난다.

1985년에 출시된 야구 게임, 하드볼 (Hardball!)

내가 중학생이 되자 삼국지 게임이 유행했다. 역사와 소설을 바탕으로 한 KOEI 사의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난 이런 게임들이 너무 좋아해서 또 다시 게임에 중독되었다. 내가 군주가 되어 장수를 등용하고, 삼고초려 끝에 설득하기도 하고, 충성심을 높이기 위해 선물을 하기도 하고, 충성심이나 능력치가 떨어지면 해고하기도 했다. 백성들의 민심을 사야 했지만, 동시에 민심을 낮추면서도 어쩔 수 없이 병사를 모집하기도 했다. 가끔 예고 없이 전염병이 돌 때도 있었다. 민심이 바닥에 떨어지고 많은 병사들이 죽었다. 그러면 다시 열심히 일해서 복구해야 했다. 어느 정도 힘이 갖추어 지면 옆 나라에 쳐들어간다. 이에는 치밀한 전략이 필요했다. 군량미와 돈이 충분해야 했고, 지형도 나에게 유리해야 했으며, 장수들의 충성심이 높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 중 훌륭한 장수가 상대편으로 도망가는데, 이건 가장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수많은 파라미터를 내가 소유하고 있었고, 그 파라미터를 이용해서 나라를 잘 운영하면 백성들이 즐거워했고, 제갈량과 같은 훌륭한 모사를 데려올 수 있었고, 조..와 같은 모든 능력치가 최상급인 아주 드문 장수를 고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여러 날이 걸려 결국 중국 전 대륙을 통일하는 순간의 성취감은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그 성취감을 느끼고, 또 느끼고 싶었다.

코에이(KOEI) 사의 삼국지 1

지금은 게임들이 많이 한글화되어 있지만, 당시엔 모든 게임이 영어였다. 그래서 게임을 할 때는 항상 사전을 옆에 두었다. 곧이어 웬만한 게임용 영어 단어들은 다 뜻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해하기 힘든 게임이 있었다. ‘Leisure Suit Larry’이라는 성인용 어드벤쳐 게임이었다. 사실 흑백 그래픽인데다 알아보기도 힘들어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것도 아니었지만,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이런 게임이 너무 재미있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매뉴얼을 보고 따라했고, 게임에 나오는 대화가 궁금하면 일일이 사전을 찾아 뜻을 알아보았다. 그렇게, 나는 영어와 친근해졌다.

시애라(Sierra) 사의 성인 게임, Leisure Suit Larry

한편, 중학교 때 또 새로 등장한 기기가 있었다. 모뎀(Modem)이었다. 일종의 인터넷의 전신인데 전화선을 이용해서 데이터를 주고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한동안 모뎀이 주는 재미에 빠져 내가 직접 홈페이지를 만들기도 했다. 결국 방문한 것은 내 친한 친구 세 명 뿐이었지만. 모뎀을 이용하자 게임을 훨씬 다양한 다운로드할 수 있었고, 한때는 미국의 사이트에 접속해보기도 했다. 물론 전화비가 많이 나왔고, 쓰는 사람도 없는 국제 전화 요금이 10만원 이상 나오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도 컴퓨터 게임은 계속 즐겼다.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되면 어머니는 키보드를 빼앗아 어딘가에 숨기곤 하셨다. 다음 번 시험에서 성적이 좋으면 키보드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 성적이 떨어지거나 잠을 제대로 못 자면 다시 키보드를 빼앗겼다.

내가 게임을 손에서 완전히 놓았던 것은 고등학교에 다니던 3년의 기간이었다. 생각지도 않게 외고에 합격했고(당시 성적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합격의 기쁨과 함께 나 자신, 그리고 어머니와 약속 한 가지를 했다. 3년동안 컴퓨터, 또는 컴퓨터 게임을 손에 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당시 나의 새로운 취미가 되었던 기타를 선물받았고, 좋은 대학에 입학하면 가장 비싼 컴퓨터를 사주겠다는 어머니의 약속을 받았다.

게임을 내 삶에서 떼어나면 참기 힘들줄 알았는데, 막상 안하기 시작하니 이내 잊어버렸다 (원래 중독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 중학교 때 상위권이던 성적이 외고에 입학하자 중위권을 맴돌았고, 충격을 받은 나는 공부에 에너지를 쏟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게임에 중독시켰던 에너지와 게임을 통해 느꼈던 성취감을 온전히 공부에 쏟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시간을 아껴 살았던 시간이었다. 3년간 그렇게 하자 성적이 점차 올라갔고, 명문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서울대에서 입학 통지서를 받은 날, 나는 어머니에게 곧바로 3년 전의 약속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어머니는 약속을 지켰다. 용산 전자상가에 가서 ‘불필요할만큼 사양이 높은’ 시가가 300만원에 달하는 컴퓨터를 사주셨다. 3년간 컴퓨터 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했고, 게임도 그와 함께 크게 발전해 있었다. 다시 게임을 시작했지만, 대학생이 된 나에게는 미팅, 데이트, 동아리 활동 등 이미 게임보다 훨씬 재미난 것들이 많아 다시 게임에 빠질 일은 없었다. 물론 당시 새로 생긴 PC방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하느라 많은 시간을 쓰기는 했지만.

언젠가는 게임을 만드는 일을 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학교 4학년 때 중요한 사람들을 만났다. 강병도, 김상준, 한승현, 박재형, 그리고 현재 게임빌의 송병준 대표이다. 게임을 만들기 위해 공대 전산실에 모였다. 함께 밤낮 없이 게임을 만들었고, 난 그 과정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첫 제품을 출시한 이후 게임빌에서 7년간 모바일 게임을 만들었고, 수많은 게임들의 제작 과정을 관리했다. 결국, 어린 시절에 즐겼던 게임 덕분에 대학 졸업 후 기꺼이 게임 만드는 일을 택했고, 그 덕분에 큰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고, 그 다음 도약의 중요한 토대가 된 행복했던 7년을, 나는 게임빌 사람들과 함께 보냈다.

창업부터 7년간 함께 했던 공간, 게임빌

게임의 긍정적인 작용이 대량의 통계를 통해 증명된 적은 없지만, 마찬가지로 게임의 부정적 작용이 제대로 증명된 적도 없다. 게임의 중독성이 가져오는 폐단이 없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언론을 통해 나타나는 부작용들이 없는 사실을 지어 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체의 일부일 뿐이다. 난 지금 우리 사회를 이끄는 수많은 기업가들과 리더들이 한 때 게임에 중독되던 경험이 있었을 것이라 믿는다.

게다가, 게임에 중독되는 사람이라면 다른 무엇에도 중독될 수 있다. 이 세상에 사람들을 중독시키는 요소는 무한히 많다. 사회의 안정을 위해 그 중 몇 가지는 법으로 규제된다. 그래서 게임도 그런 카테고리 안에 넣어서 규제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게임에 중독되어 헤어나오지 못하던 나를 눈물 흘리고 기도하며 바라보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게임을 지나치게 규제하려는 움직임은, 나에겐 부질없어 보이고 불필요해 보인다. 셧다운제 도입 이후 청소년 심야 접속은 4.5% 감소했을 뿐이고, 아이들은 실효성에 대해 코웃음을 치고 있다고 한다. 만약 게임을 하기 위해 부모님의 지갑을 열어 주민등록번호를 훔쳐갔다면, 부모님을 속이게 되는 사례만 하나 증가했을 뿐이다.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도 많았고 책도 많았지만, 게임이 나에게 끼친 영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게임은 실제 세계의 규칙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좋은 게임은, 무엇이든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어찌 보면, 우리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현실 반영적’ 요소가 없는 게임은 애초에 사람들을 중독시킬 수도 없고 시장에서 이내 사라지고 만다.

  1. 트레이드 오프 (Trade off) – 게임에서 한 가지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 모든 것을 만족시킬 수는 없고 모든 상황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 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사람은 재미를 느낀다.
  2. 성장 및 성취감 – 내가 주인공으로서 성장하기도 하고, 다른 캐릭터의 성장을 도와주기도 한다. 무기나 아이템을 통해, 아니면 전투 경험을 통해 강해진다. 어제는 내게 버거웠던 적이 오늘은 너무나 쉽게 한 방에 끝날 때의 쾌감, 게임을 해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3. 전략 및 판단 – 빠른 판단력 또는 신중한 전략. 좋은 게임은 이 둘 중 한 가지를 요구한다. 끊임 없이 머리를 써야 하고 머리가 늦게 반응하거나 손이 늦게 반응하는 순간, 즉 방심하는 순간 게임은 끝이 난다. 중요한 결정을 잘못 내렸을 때의 결과는 돌이킬 수 없게 되기도 하고, 이런 때는 아까운 시간을 뒤로 하고 다시 시작하거나 결정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7년간 게임을 만드는 일을 해 보고 나자, 난 더 이상 게임에 중독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 무슨 게임이든, 흐름이 파악되고 제작자들이 어떤 생각으로 만들었을 지 예상이 되는 순간 이내 싫증이 나버린다. 그렇지만 한 때 내가 게임에 중독될 만큼 게임이 가져다주는 스토리와 내가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었다는 사실은 달콤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옛 이야기 – 내 인생을 바꾼 스무살의 호주 여행

미국에 살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있다면, “어떻게 유학을 오기로 결심하게 되었고 왜 졸업하고 미국에 남기로 했는가?”이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을 한다. 한국에 있으면서 이런 저런 일로 캘리포니아를 방문했었는데, 그러다 보니 이 곳이 좋아져서라고 대답할 때도 있고, 교통 체증을 매우 싫어하는데, 여긴 차가 막히지 않아 스트레스가 적어서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좀 더 길게 설명할 시간이 되면 더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생 시절, 방학때 종로 파고다 학원을 오가다가 종로 서적에서 우연히 발견한, 나에게 정말 큰 영향을 끼친 책, ‘시작 – 세계를 향한 문을 열면서‘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조금 더 과거로 가 보면, 내가 한국을 나와 언젠가 다른 곳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그건 스무 살 나의 첫 해외 배낭 여행, 호주 여행이다.

호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 단순했다. 1학년 여름 방학을 과외 하면서 보낸 이후, 겨울 방학엔 뭔가 나를 위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갑자기 배낭여행이 유행이 되어서 많은 친구들이 여름에 유럽에 다녀 온 이야기를 했다. 겨울에 배낭 여행을 가자니 옵션이 많지 않았다. 춥지 않은 곳으로 알아보니 호주/뉴질랜드, 아프리카, 남미 등이 옵션이었다. 마침 친구가 호주로 배낭여행을 갈까 생각하고 있는데 같이 가자길래 알아보기 시작했다. 호주는 사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유럽처럼 문화가 깃든 곳도 아니고 말이다. 나중에 나이 들어 휴양지로 가면 모를까 대학 1학년 배낭여행으로 가기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그렇다고 다른 옵션이 대단히 매력적인 것도 아니고, 마침 호주행 비행기가 싸게 나온 게 있어서 호주에 한 번 가보기로 했다. 호주 동북쪽 해안도시인 케언즈(Cairns)로 들어가서 시드니(Sydney)로 나오는 여정이었다. 패키지 여행은 하기 싫어 여행사를 통해 항공권과 유스호스텔 숙박권, 그리고 그레이하운드 버스 티켓만 사서, 1월 4일. 콴타스 항공편으로 호주로 날아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는 비행기였다.

비행기에 타기 전에는 한겨울 날씨였는데, 케언즈에 도착하자 갑자기 한여름으로 바뀌었다. 참 신기하면서 이상한 기분이었다. “Days”를 “다이즈”라고 발음하는 호주 사람들의 억양도 한없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것도 잠시, 케언즈에서 래프팅을 하고 나자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호주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화창할 날씨와 파란 하늘, 친절한 사람들, 수영장이 있는 호스텔.. 20년을 서울에서만 살았던 내게는 모든 것이 색다른 경험이었다.

하얀 모래로 뒤덮인 프레이저 섬(Fraser Island) 투어, 산호초와 아름다운 열대어가 가득한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Great Barrier Reef)에서의 스노클링, 절벽 해안도로가 끝없이 펼쳐진 그레이트 오션 로드(Great Ocean Road)에서의 캠핑 등도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호주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떠올리라고 한다면, 아름답고 평화로운 작은 해안 마을, 누사(Noosa)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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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오션 로드 (Great Ocean Road)

누사(Noosa)는 케언즈에서 시드니에 이르는 여정의 중반쯤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사실 원래는 들를 생각이 없었다. 그보다 유명한 도시인 브리즈번(Brisabane)에 들렀다가 아래로 더 내려가볼 생각이었다. 근데 타려고 했던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일정을 조정하게 되면서 대신 누사를 들러보기로 했다. 들고 다니던 여행 책에 나온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버스에서 내려 먼저 백팩커 하우스를 찾았다. 저렴하고 괜찮아 보여 선택한 곳은 누사 백패커스(Noosa Backpackers)라는 곳이었다. 배낭만 방에 놓고 다시 나와 자전거를 빌려 마을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동화 속 세상에 온 것 같았다. 그 날이 금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건장한 남자들이 어깨에 다들 서핑 보드를 하나씩 지고 바다로 나가고 있었고, 평화로운 누사 해변은 그 어떤 걱정거리라도 잊게 해줄만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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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사 해변

밤에는 다운타운을 둘러보았다. 레스토랑에는 사람들이 야외 테이블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여행 경비를 최대한 아끼던 우리에게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에서의 식사는 상상할 수 없는 사치였다. 항상 수퍼마켓에서 식빵과 상추, 참치 등을 사서 샌드위치를 만들어먹곤 했었다. 그러나 그 날은 특별 대우를 하기로 했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사먹기로 한 것이다! 거리에서 기념품을 팔던 사람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나: 실례지만, 맥도널드가 어디죠?
상인: 여기서 쭉 가신담에 저기서 왼쪽으로, 그다음 좀 더 가다가 다시 오른쪽… 그리고 왼쪽…
나: “…”

내가 제대로 못알아듣는 걸 눈치챘나보다. 감을 못잡고 있으니까 갑자기 자기가 직접 안내해주겠다고 나섰다. 팔던 물건들을 다른 사람에게 봐달라고 부탁한 후에 우리더러 따라오라고 했다.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학생이란다. 이름은 다니엘(Daniel), 나이는 17살. 이제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 된 거다. 우리나라 고3이면 공부하느라 바쁜건데 어떻게 이런 데 나와서 기념품을 팔고 있을 수 있는지 의아하면서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궁금하던 것들을 물어보았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유치한 질문들이다. 상가들을 가리키면서 저건 비디오를 빌리는 곳이냐, 저기가 식당이냐, 여기는 뭐하는 데냐.. 뭐 이런 질문들이었다.

직접 데려다주겠다고 나서길래 난 맥도널드가 바로 가까운 곳에 있는 줄 알았다. 세상에.. 무려 15분을 함께 걸었다. 너무 미안했다. 장사라는 건 시간이 곧 돈일텐데 이렇게 큰 친절을 배풀다니… 살면서 낯선 사람에게 그런 친절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우리는 크게 감격했다.

맥도널드에서 오랜만에 햄버거를 맛있게 먹고 나왔다. 아까 받은 친절에 뭔가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니엘을 다시 찾아갔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뭔가 사줄 게 없을까 하고 둘러보았는데 사실 마땅한 건 없었다. 다시 말을 걸었다.

나: 이게 뭐죠?
다니엘: 우리 동네에서 나는 불가사리에요. 말린 거죠. 예쁘지 않나요?
나: 이건요?
다니엘: 휴대폰용 액세서리에요. 어디서 오셨지요?
나: 한국에서 왔어요. 배낭여행중이지요.
다니엘: 멋진데요? 전 한국에는 가본 적 없어요.
나: 아름다운 나라에요. 언젠가 가보세요.
다니엘: 물론이죠. 그러고 싶어요. 근데… 우리집에 놀러가지 않을래요? 초대하고 싶은데.. 어쩄든, 오늘 장사는 이정도로 됐어요.
나: 집에 초대한다구요? 멋진 일인데, 정말요?

친구와 나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가? 거리에서 만난 낯선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다니…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다니엘은 집에 전화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랑 통화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기로 했다.

3분쯤 지났을까.. 다니엘의 아버지가 트럭을 타고 나타났다.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하더니 트럭에 타란다. 집에 초대하겠다고. 어안이 벙벙했지만, 지상 낙원처럼 평화로운 누사에서 별 일이 있겠나 싶어 따라가기로 했다.

트럭을 타고 다운타운을 벗어나 깔끔하게 정돈된 주거지역에 도착했다. 이미 날이 어두워졌었고, 풀받에서 귀뚜라미가 청명한 소리로 울고 있었다. 앞마당에 잔디가 있는 아담하고 예쁜 집이었다. 차에서 내려 다니엘과 그 아버지의 안내에 따라 집 마당 잔디를 거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은 벗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집에 들어가자 데이빗의 어머니가 컵 케익 두 개를 들고 활짝 웃으며 우리를 반겼다. 자기가 직접 만든거란다. 스무살 겨울의 배낭여행 중 일어난 일. 우리 앞에 놓인 모험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가 부풀고 있었다.

다니엘, 다니엘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친구와 나는 마루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국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가보다. 한국이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몇 명이 살고 있는지, 서울은 어떤 곳인지, 북한과 남한은 왜 나위어 대치하고 있는지 등등에 대해 질문을 했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 대답했다. 영어를 잘 하지는 못했지만, 호주 배낭여행중에 만난 이 가족과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니 무척 뿌듯했다. 그래도 영어 공부한 시간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앨범을 가져오더니 작년에 호주 서부로 가족 여행을 갔을 때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다윈, 퍼스 등등.. 같은 나라지만 무척 다른 풍경을 가진 곳들이었다. 야생 앨리게이터라며 보여주었는데, 처음엔 앨리게이터가 뭔가 했다. 악어를 호주에서는 앨리게이터라고 부르는구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했고, 다니엘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다니엘의 어머니는 다니엘이 음악을 좋아해서 기타도 잘 치고, 운동을 좋아해서 서핑도 잘 하고, 다방면에 소질이 있다며 자랑을 했다. 좀 신기했다. 고등학교 때 하루 15시간씩 공부하느라 다른 곳에 쓸 시간이 전혀 없었던 나로서는 고등학생이 어떻게 그렇게 여유롭게 지낼 수 있을까 의아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농담삼아 물어보았다.

나: “우와 소질이 많네요.. 공부 빼고는 다 잘하는 것 같은데요? :)”
엄마: “하하하.. 우리 다니엘은 공부보다는 사업을 하고 싶어해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줄 거랍니다. 이 나라에서는 뭐든지 한 가지만 잘 하면 잘 살 수 있는 길이 아주 다양하게 있어요.”

그 엄마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진정으로 아들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고, 다니엘이 재능 있는 아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그 표정 말이다. 한국에서만 자란 나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부 잘하는 게 전부고, 그래야 어머니들이 자랑스러워하지 않는가? 공부 잘하는 것이 나중에 먹고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자원이 풍부하고 관광 수입이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호주라서 그 기준이 다른 것일까?

2시간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같이 기념 사진도 찍고, 이메일 주소와 집 주소도 받아서 집을 나왔다. 나중에 꼭 다시 방문할테니 그 때까지 다른 곳에 이사가지 말아달라는 당부와 함께. 아쉽게도 배낭여행하고 돌아오는 동안 주소를 적은 쪽지를 잃어버려 다시 연락할 길은 없어졌지만, 스무살 배낭여행 때 만났던 누사의 평화롭고 여유로운 분위기와 우리에게 환대를 베풀었던 다니엘과 다니엘의 가족, 그리고 그 대화에서 받은 신선한 충격은 내 기억에 오래도록 남았다. 그리고 생각하게 되었다. ‘언젠가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 가서 한 번 살아보자.’

그렇게 해서 시작된 해외 여행. 그 후 기회만 되면 밖으로 나갔다. 중국, 일본,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아르헨티나, 미국 등을 방문하면서 항상 생각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무엇으로 돈을 버나? 생활 환경은 어떤가? 거기서 살려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영어 말하기/듣기 공부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영어는 공부할 대상으로만 생각했는데, 여행하고 돌아와보니 영어는 그냥 도구(Tool)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와 다른 곳에서 태어나 다른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과 대화하는 도구. 영어를 할 줄 모르면 내가 의사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4천만명으로 제한되지만, 영어를 할 줄 안다면 적어도 10억명의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하루 빨리 이 도구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오랜 시간을 영어 공부에 투자한 후, 내가 살고 싶은 곳을 찾아내었다. 캘리포니아.

옛 이야기 – 아웃백 스테이크하우스에서 있었던 일

얼마전, 아웃백에서 오랜동안 일하시다가 실리콘 밸리에 와서 무역회사 대표로 일하시는 한 분을 만나서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레스토랑 사업에 대해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정말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러다가 예전에 아웃백에서 있었던 일화 하나가 생각이 나서 여기에 소개한다.

2004년의 일이다. 주말 저녁, 친구와 아웃백 양재점에 갔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Outback은 Bennigan’s와 TGI와 경쟁을 하며 시작한 수많은 패밀리 레스토랑 중의 하나였다. 30여분을 기다려서 자리에 잡고 앉아 맛있는 식사를 하고 나왔다.

식사하는 동안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카메라를 안들고 나왔다는 사실은 안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아뿔싸, 동생한테 빌린 건데… 걱정을 하며 아웃백 양재점에 바로 전화했다.

나: “여보세요? 아웃백 양재점이죠? 죄송한데 어제 저녁에 카메라를 놓고 나온 것 같습니다. 확인해주실 수 있어요?”
아웃백: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지금 한 번 확인해보겠습니다.”
나: “네…” (제에발…!)
아웃백: “아, 다행이네요. 어제 한 직원이 카메라를 발견해서 저희가 보관하고 있다고 하네요. 찾으러 오시면 됩니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찾으러 가려고 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이번엔 지점장으로부터의 전화였다.

지점장: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어제 카메라를 발견해서 캐비넷에 넣어두었던 것을 제가 확인했습니다만, 오늘 아침에 다시 보니 카메라가 보이지 않네요.”
나: “네?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지점장: “처음부터 카메라가 없었으면 다른 손님이 가져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에는 분명 저희가 발견해서 넣어두었는데 밤 사이에 없어진 것이므로 직원이 가져간 것 같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시간 되실 때 매장을 한 번 방문해 주시면 같이 가서 카메라를 사드릴게요.”

김동진 지점장

정말일까? 80만원 가까이 하던 니콘 카메라였는데… 다음날 오후, 양재점에 다시 갔고, 작달막한 키의 한 분을 만났다. 김동진 지점장이라고 쓰인 명함을 받았다. 그리고 그 분과 함께 뒤쪽 주차장으로 갔다. 아웃백 로고가 박힌 자그마한 차.. 이정도 규모의 지점을 운영하는 분 치고 차가 너무 소박해서 인상이 깊었다. 카메라는 남대문이 싸다고 하기에 같이 남대문으로 가기로 했다.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중 기억나는 대화 몇 가지..

나: “언제, 어떻게 아웃백에 join하게 되셨나요?”
김지점장: “원래 베니건스 본사에서 오랫동안 일했었습니다. 아웃백이 한국에 진출하고 나서, 양재점을 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제 돈을 투자해서 지점을 시작했습니다.”
나: “왜 옮기게 되셨나요? 그리고 이런 사고가 나면 직접 가서 잃어버린 물건을 사주시나요? 정말 인상깊습니다.”
김지점장: “아웃백은 그게 좋습니다. 제가 바로 바로 결정할 수 있어요. 베니건스는 지점장을 본사에서 고용해서 보내고, 중요한 결정을 본사에서 내리기 때문에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 결재가 필요하고, 그래서 오늘처럼 이렇게 저의 재량으로 즉시 조치를 취할 수가 없지요. 아웃백은 지점장이 주인이고, 본사와는 이윤을 나누는 방식이기 때문에 고객 서비스를 높이기 위해 필요하다면 제가 바로 결정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 점이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나: “아웃백 양재점은 항상 사람이 많던데… 단지 위치가 좋아서인가요? 마케팅은 어떻게 하나요? 독특한 방법이 있다면…?”
김지점장: “정말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했던 것 중 한가지 생각나는건 키즈(kids) 마케팅입니다. 아이들에게 한 번은 공짜로 아웃백 점심을 주겠다고 광고한 적이 있어요. 많이들 왔지요. 근데 중요한 건 아이들은 항상 부모님을 데리고 온다는 거에요. 아이들한테 끌려서 한 번 온 후에 그 부모님들이 당골 고객이 되어 좋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남대문 전자제품 시장에 도착했고, 나는 약 1시간동안 둘러보다가 그 당시 호평을 받던 Canon Powershot G3 카메라를 사기로 결정했다. 김지점장님이 와서 바로 카드로 결재했고, 그 모든 과정이 나에게는 참 신기하기만 했다. 당시에 거액에 달하는 80여만짜리 카메라를, 그것도 내 실수로 테이블에 놓고 나온 건데 이렇게 지점장이 직접 같이 와서 기다려주고 돈을 내주다니… 그런 서비스는 처음이었기에 매우 깊이 인상에 남았다.

지점장님은 여전히 불편을 주어 미안하다며 언제든 오면 자기가 맥주 한 잔 대접하겠다고 했고, 그 이후 친구들을 아웃백에 데려가면 종종 지점장님이 계신지 물어서 인사를 했고, 그 분은 볼 때마다 나 뿐 아니라 친구들에게까지도 모두 맥주를 한 잔씩 돌리곤 했다. 아웃백은 그 이후 내가 가장 선호하는 패밀리 레스토랑 브랜드가 되었고, 그 때 샀던 카메라는 지금까지도 잃어버리지 않고 잘 쓰고 있다.

이 이야기를 마치자 식사를 하던 그 분의 눈이 빛났다. 그 분이 아웃백 양재점에서 일했는데, 양재점 김동진 지점장님이 바로 자신의 직속 상사였다는 것이다. 김동진 지점장 – 그 분은 지금은 지점 10개 정도를 담당하는 본부장으로 승진했다고 한다. 최근 유난히 이런 인연을 많이 만나게 된다. 아는 사람들이 점점 연결되고, 같은 분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끼리 연결되다보니 그런 것이겠지만, 그래도 언제나 신기하고 감사하다.

한편, 시간을 빨리 돌려서… 2009년에 있었던 일 하나를 더 소개한다. MBA 수업시간 중, 한 조가 Outback Steak가 한국에서 성공한 케이스를 조사해서 발표했다. 미국의 수많은 패밀리 레스토랑 중 하나에 불과했던 아웃백이 한국 시장에서 얼마나 뛰어난 실적을 보여주고 있는지 보여주었는데 그 때 아웃백이 진출한 18개의 나라 중 한국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해외 매출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아웃백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수많은 요인이 있지만, Kyuho Lee, Ph.D., et al, “Outback Steakhouse in Korea: A Success Story” 에서는 Decentralized Organization(분산적 조직)을 가장 큰 요인으로 꼽고 있다. 한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Based on the analyses, it became apparent that the most significant competitive advantage for Outback Steakhouse Korea was its decentralized organization. The company minimized the number of headquarters staff and shifted key activities and responsibilities (such as site selection, contracting with suppliers, and training) to the firm’s eight regional operating partners and the managing partner of each outlet. For instance, each regional operating partner has full responsibility for opening new outlets, ranging from site selection to hiring staff, while managing partners are in charge of such day-to-day activities as employee training, customer service, and local marketing. There are only twenty-one headquarters staff members, far fewer than is true of the firm’s competitors. Overall, this decentralized organizational system facilitates an accelerated decision-making process, enhances supply procurement, and minimizes the costs associated with the upkeep of headquarters.

(한글 요약 번역) 우리의 조사에 따르면 아웃백 스테이크하우스의 가장 중요한 경쟁 우위는 분산 조직(decentralized organization)이다. 본사 스태프들의 숫자는 최소한으로 줄여, 경쟁사보다 훨씬 적은 21명밖에 되지 않는다. 각 지점 담당자가 직원 고용, 트레이닝, 고객 서비스, 지역별 마케팅을 담당한다. 그 결과 결정을 내리는 속도가 훨씬 빨라지게 된다.

Decentralized organization. 고객이 카메라를 잃어버리자 그 다음날 즉시 신용카드로 새로운 카메라를 사 주는 의사 결정 재량과 속도, 그것이 훗날 아웃백 성공의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이다. 기업이 이 원칙을 적용한다고 모두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그런 의사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충분한 권한과 책임, 그리고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릴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의사결정을 어디서 하는 것이 옳은가를 알아야 한다. 모든 의사결정 권한이 분산된다고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업을 인수하거나, 점포를 개설하거나, 회사 전체의 브랜드를 일관적으로 만들어가는 일은 본사에서 해야 한다. 알맞은 곳에 알맞은 정도의 의사결정 권한을 주는 것, 결코 쉽지 않으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인생이 각 순간의 선택의 결과이듯, 의사결정이 모여 기업을 만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