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와 컴퓨터

영어와 컴퓨터
Drawing by Haken45

1990년 2월. 서울의 한 초등학교. 6학년 졸업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우리는 이제 이 곳과는 이별이라는 생각, 그리고 옆에 있는 많은 친구들과 헤어져야만 한다는 아쉬움과, ‘중학교’라는 새로운 장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그리고 ‘중학생’이 되면 우리도 이제 전보다는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더 이상 시험은 없었다. 며칠간 학교에 나와 가벼운 마음으로 수업을 듣고, 선생님과 인사하고, 친구들과 인사하고, 졸업식을 치른 뒤 집에 가면 신나는 방학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세 시쯤 되었을까. 평소에는 월요일 조회 시간에 교단 위에서만 볼 수 있었던 교장 선생님이 예고 없이 갑자기 교실에 등장했다. ‘담임선생님 대신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러 오신 걸까? 교장 선생님도 수업을 하실 수 있나?’하는 의아함으로 우리는 앞에 양복을 입고 선 그 분을 쳐다보았다.

학생 여러분, 오늘 두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에 왔습니다. 딱 두 가지입니다. 여러분이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는 지금 시점에서, 지금까지 배웠던 것은 잊어버려도 좋은데 이 두 가지만은 꼭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첫째, 오늘부터 집에 가면 이렇게 해보세요. 저녁을 먹고, 휴식을 한 후, 운동도 하고 TV도 보고 나서 책상에 앉아보세요.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지는 마세요. 그냥 5분만 책상에 앉아 있다가 내려오세요. 오늘 할 일은 그걸로 끝입니다. 내일 학교에 왔다가 집에 가서, 똑같이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한 후 책상에 10분간 앉아보세요. 마찬가지로 책을 읽지는 말구요. 그 다음날은 30분간 책상에 앉아 보세요. 그 때 책을 읽어도 좋고 그림 그리기를 해도 좋아요. 네번째 날, 책상에 앉거든 책을 한 권 꺼내세요. 그리고 읽어보세요. 그 다섯 번째 날에는 좋아하는 과목으로 풀고 싶은 문제집을 선택해 보세요. 그리고 한 시간동안 앉아서 풀어보세요.

집에 가서 하루에 몇 시간을 숙제하느라 책상에 앉아 있곤 하던 나에게 교장선생님의 말씀은 꿀맛처럼 들렸다. ‘오늘은 이 핑계로 5분만 책상에 앉아 있으면 되겠다!’ 그리고 그 말대로 해보았다. 하루에 5분만 책상에 앉고 나머지 시간을 놀면서 보내고 나니 이내 지루해져 이틀째부터 책을 집어 들고 말았지만.

둘째, 이제 10년 후면 20세기가 지나고 21세기가 됩니다. 학업을 마치고 여러분들이 나가서 살게 될 세상은 21세기이며, 21세기는 새로운 인재와 새로운 기술을 요구할 것입니다. 21세기에 대처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무엇일까요? 한 가지는 영어입니다. 세계가 더 많이 연결될수록, 영어의 중요성은 더 커질 것입니다. 영어를 꼭 마스터하세요. 두 번째는 컴퓨터입니다. 컴퓨터 언어를 배워두세요. 컴퓨터가 지금보다 더 많이 쓰이고, 컴퓨터 없이는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중학교에 진학하고, 대학교에 가서도 이 두 가지를 기억하세요. 영어와 컴퓨터.

30분의 짧은 강의였지만, 그 때 교장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마음에 강렬하게 남았다. ‘앞으로 내가 살게 될 세상은 영어와 컴퓨터가 중요하겠구나.’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미국에 살며 매일 동료들과 영어로 회의하며,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며, 인터넷과 모바일 혁신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세상을 보고 있다.

그 분의 성함은 조성선이다. 나와 이름이 비슷해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7년 전쯤, 버스 타고 가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 찾아본 적이 있었다. ‘디지털 교장선생님’으로 불리고, 컴퓨터 관련 서적만 10권이 넘게 출간했다는 2002년의 중앙일보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관악구의 미성 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시며, 한국의 자연을 사진에 담는 취미 활동을 하고 계셨다. 미성초등학교 홈페이지를 찾아가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그 당시 초등학교 6학년 때 교장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 때 말씀대로 영어와 컴퓨터 두 가지를 공부했고, 지금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수출하는 게임을 만들고 있다고.

연락 고맙습니다. 멋진 삶을 살기를 바래요.

짧은 답장이 달렸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연락한건데 답장이 너무 짧아 좀 아쉽기도 했지만, 그동안 재직했던 초등학교를 통해 배출한 학생들이 얼마나 많을텐데 일일이 답장하기 힘드시겠구나’라는 생각도 했다.

지금, 졸업하는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에게 10년, 20년 후를 대비해서 두 가지를 꼭 익히라고 말한다면 무엇이어야 할까?

12 thoughts on “영어와 컴퓨터

  1. 독자에게 생각 할 것들을 던져주는 좋은 글입니다.
    덕분에 저도 생각을 해보니 당장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는 친구들에게 할 말은 상세 하게 떠오르지만
    초등학교 6학년이라 ㅎㅎ
    친구를 소중히 하고 도덕적으로 길잡이가 될만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네요
    15년 20년 뒤에는 왠지 그런 것들이 더 소중해 질 것만 같습니다.

  2. 와… 흡사 영화같은곳에 나올법한 이야기네요. 소름도 돋고 멋지네요.
    10년, 20년후라.. 저도 이제 20살이 곧 될 나이어서 그런점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본적은 없지만,
    한가지 말할수있는건 SNS를 비롯해서 각종 전세계를 잇는 매체들이 등장하는 만큼 ‘소통'(독자및 고객과 적극적으로 의견주고받고,피드백도 적극적으로 부탁하는등)의 능력이 어떤 일을 함에있어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말해주고싶네요.

  3. 초등학교 졸업식에 교장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실천해보는 사람이 더 대단한것 같습니다. 역시 실천의 힘??

  4. 대학교 4학년이 될 무렵 실리콘밸리에서 반도체 디자인을 하시는 분(그렇게 소개했음)과 만난 적이 있는데 미국 이야기며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자 대뜸 전 ‘전 영어와 컴퓨터를 못하는데 대단하세요!’라고 말한 기억이 이 글을 읽으면서 떠오르는데요? 그게 저에겐 영어와 컴퓨터에 대한 기억 중 가장 컸던 듯. ^^ 요즘 세상에 배우고 익혀야 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지만 그걸 진정 제대로 배우고 익혀서 직접 사용하고 가치를 만들어 내는 사람은 드문 것 같아요. 성문님은 그 드문 사람 중 한 분이시네요. ^^ 이 글 읽으면서 어떤 면에서는 쉽게 흘러 들을 수 있는 조언 한마디가 어떤 사람에게 힘을 주고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동생들이나 후배들에게 조언을 할 일 있을 때 잘해야 될 것 같아요. 연말이네요. 메일로 인사드릴까 하다 댓글로 인사드려요. 해피 크리스마스! 더불어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 반가워요! 제가 이런 조언들을 일일이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이 교장선생님 말씀은 유난히 기억에 남았어요. 보은님은 분명 후배들에게 귀중한 조언들을 하고 있으리라 믿어요. Merry Christmas!

  5. 오래전에 읽었지만, 다시 생각나서 들러봅니다.
    저에게 3살난 아이가 있는데, 이 아이시대에 ‘영어와 컴퓨터’는 무엇이 될까? 오늘은 문득 그런 질문이 떠오르네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6. 좀더 일찍 깨달았다면 열심히 영어와 컴퓨터 공부를 할껄 `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남들은 말하지만 기억력도 떨어지고
    눈도 침침하고 그러나 하고 싶다는 것이 현재의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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