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 (Flow)

지난 몇 달동안 ‘몰입‘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 출연했던 황농문 교수의 ‘공부하는 힘, 몰입이라는 강연을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자신이 지도했던 많은 학생들이 몰입을 연습하고 경험하면서 공부를 즐기게 되고, 결과적으로 학교 성적도 좋아졌다는 사실을 공유한 것인데, 학생들이 보냈다는 이메일을 하나 하나 보며 참 감동이 되었다. 그는 몰입의 경험을, ‘처음에는 도저히 못할 줄 알았는데 혼신의 노력 끝에 결국 해냈다‘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의도적인 도전과 응전의 경험인데, 이런 성공 경험을 반복할 때마다 불연속적으로 성장하며, 더 많이 반복할수록 좋다고 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나는 몰입을 경험하며 살고 있는가. 종종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내가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고 느꼈던 시기가 몇 번 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고등학교 때이다. 영어를 일찍부터 공부했던 덕에 운좋게 외국어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내 실력은 친구들에 비해 한참 뒤져 있었다. 첫 시험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야 했고, 그 때 내가 택했던 방법은, 오로지 공부만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내 머리가 비상한 게 아닌 바에야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문제는 친구들 모두 학교에서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공부한 후, 밤 11시에 또 학원이나 독서실에 간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더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쉬는 시간을 활용하고, 자습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자습 시간에는 항상 계획을 짜 놓고 시작했다. 마라톤이 아니라 100미터 달리기를 여러 번 하는 심정으로 공부했다. 그러다보면 자습 시간에 너무 바빴다. 그러고 나서 밤 11시가 다 되어 학교를 나오면서 캄캄한 하늘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피곤하고 지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신이 나고 힘이 솟았다. 자습시간이 끝나버린게 아쉽다고 생각했다.

내가 고등학교 때 공부가 재미있었다고 하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로 난 공부가 재미있었다. 뭘 외우고 문제를 푸는 게 재미있었다기보다는, ‘몰입’이 나를 즐겁게 하고 나에게 에너지를 주었던 것 같다. 몇 시간, 며칠동안 완전한 몰입을 경험하고 나면, 다음의 몰입이 기다려지고 더 큰 과제에 도전하고 싶어진다.

대학교에 입학하자 놀기에 바쁜데다 동시에서 신경써야 할 일들이 크게 많아지며 몰입할 기회는 많이 없어졌다. 그러다가 3학년 때 까다로운 전공 과목들을 공부하며 다시 몰입을 경험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수업이 문수묵 교수의 ‘자료구조 및 알고리즘 (Data Structure and Algorithm Analysis)’이었는데, 까다로우면서도 오랜 시간 생각해야 풀 수 있는 과제들이 많아 답을 찾기 위해 10시간동안 컴퓨터실에 앉아 코딩하곤 했던 기억이 있다. 한 번은 밖이 시끄러웠는데 그런 것도 모르고 한참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보니 학교 축제 기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적도 있다.

게임빌 초기 시절도 몰입의 연속이었다.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까다로운 문제가 항상 발생했고, 거의 대부분 정해진 답이 없었다. 오랜 시간동안 고민하고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 때는 도서관에 가서 앉아 있곤 했다. 그러다가 결국 답을 못 찾고 전문가의 도움을 빌려야 할 때도 있었지만.

MBA를 거쳐 미국 대기업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이 닥쳤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가끔씩 몰입을 경험하곤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학교에 다닐 때처럼 몰입을 경험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다.

타파스 미디어(Tapas Media) 창업자인 김창원씨가 2010년 말에 그의 블로그에 ‘몰입지점‘ 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는 이 글에서, ‘우리 대부분은 직장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타들어가다 만 젖은 장작처럼 완전히 몰입해서 일하지 못한다’며, ‘내가 어떤 프로젝트를 할때 정말 내 자신을 잊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팀을 이루어 몰입하고 빠져들어서 할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들의 직업적 여정은 결국 그런 몰입상태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어야 한다‘고 글의 결론을 내렸다. 그 모든 말에 크게 공감한다.

몰입을 어떻게 하면 경험하고 훈련할 수 있는가? 황교수가 자신이 지도하던 박사과정 학생 중 한 명에게 권했던 방법 중 하나는 6개월동안 중고등학교 수학 문제집을 풀어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열심히 이를 따랐고, 몰입을 훈련했다.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회사에 취직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회사에 있었던 기술적 문제를 몰입적 사고로 훌륭히 해결하여 임원들에게 크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례를 소개했다. 문제를 해결하는 연습을 꾸준히 해 두면, 이를 다른 분야에도 곧 적용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지적 재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교육 방법으로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 이 강연 마지막에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황농문 교수의 강연을 들은 후에, 오랜만에 고등학교 수학 문제집을 펴 보았다. 고등학교 수학 문제와 더불어 IQ 테스트 문제집도 보기 시작했다. 까다로운 문제들을 골라 오랫동안 생각하고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확실히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IQ 테스트 문제 중 하나
IQ 테스트 문제 중 하나: 물음표에 들어갈 숫자는?

꼭 이런 문제를 푸는 동안에만 몰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같은 경우는 블로그를 쓰는 과정 중에도 몰입을 경험한다. 이 블로그에 쓴 글 중 많은 것들은 오랜 시간동안 골똘이 ‘왜 그럴까’를 생각하다가 나름대로 답을 찾았을 때 쓴 경우가 많다. 그 과정이 일종의 몰입이었고, 마침내 정리가 되어 정신 없이 타이핑을 하는 동안 몰입을 경험하곤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몰입’을 수십 년동안 연구했던 칙센트 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는 Flow라는 책에서, 사람들은 몰입을 경험할 때 가장 행복하며(people are happiest when they are in a state of flow), 이 몰입이란 ‘어떤 활동이나 상황에 완전히 빠져들어 집중하고 있는 상태(a state of concentration or complete absorption with the activity at hand and the situation)’라고 설명했다. 아래는 그의 유명한 몰입 다이어그램이다.

몰입 다이어그램. 자신의 실력이 높고, 해결하려는 문제도 어려울 때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몰입 다이어그램. 자신의 실력이 높고, 해결하려는 문제도 어려울 때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스마트폰 덕분에 우리 삶이 많이 편리해지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몰입에 투자할 시간이 적어져서 우리의 행복 지수가 낮아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상 생활에서 충분한 몰입을 경험하고 있지 않다면, 고등학교 수학 문제집을 한 번 펴보는 것은 어떨까.

18 thoughts on “몰입 (Flow)

  1. “스마트폰 덕분에 우리 삶이 많이 편리해지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몰입’에 투자할 시간이 적어져서 우리의 행복 지수가 낮아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 참으로 마음에 와 닿았는 마지막 문장입니다. Thanks for sharing the brilliant piece.

  2. “왜 몰입을 하는가? 왜 수학문제를 푸는가? 이것으로 얻는게 무엇일까?”도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단지 몰입을 통한 만족을 위해서 하는거라면… 게임같은 취미생활에 몰입하는 것도 방법 같고. 소위 ‘오타쿠’라고 불리우는 분들도 몰입을 잘 하시는 분들 같고.

    대부분 학업이나 일 때문에 몰입해야하는 경우가 다반사일텐데, “어떻게 몰입할 것인가?”, “무엇에 몰입할 것인가?”, “왜 여기에 몰입하는가?”도 고민해봐야 할거 같아요.

    1.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정말 ‘왜’가 중요하죠. 글에서 얼핏 다루기는 했습니다만, 몰입 연습을 많이 할수록 문제 해결력이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게임에 몰입하는 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몰입’의 정의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몰입은 단순이 무언가에 빠져 있거나 중독되어 있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집중(concentration)과도 다르구요. 글에서 밝혔듯,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랜 시간동안 온 정신을 집중하거나 slow thinking을 하는 것’을 몰입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몰입이죠.

      1. 게임에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랜 시간동안 온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eSports로 불리는 전략게임의 경우)

        그리고 몰입보다 우선 필요한 것은 자신이 의미있어 하고 좋아할만한 일을 찾는 것이겠죠. 그렇게 되면 유의미한 몰입이 오랜기간 자연스러워집니다.

  3. 고3 수험생이 되서야 자의반 타의반으로 공부의 재미를 깨달아 저자가 말하는 ‘몰입’을 경험했다. 수능의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그때의 경험은 지금도 내 인생에 자양분이다.

  4.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나중에도 글을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수포자였는데 몰입 훈련을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ㅋㅋㅋ 댓글에서 몰입과 집중도 다르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어떤 점에서 다른지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5. 몰입을 불교에서는 삼매라고하는데, 최근 참선을 배우면서 체험하는 것이 호흡을 통해 집중력이 강화된다는 점입니다. 거기에 추가로 화두를 생각하면 본글에서 성문님이 언급한 몰입을 경험하게 되지 않나 싶습니다. 스마트폰으로 더욱 각성이 힘들어진 현대사회에 몰입전의 준비운동격인 집중력을 높이는 명상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링크는 명상이 뇌파와 연관이 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9552

  6. 언제나 글 올리실 때마다 재밋게 봐요 감사합니다!
    이번에 올리신 문제 답이 궁금해서 처음으로 댓글 써보네요.
    제 정답 : 7

  7. 와 엄청 와닫네요..
    특히 수학문제가..
    수학할때 즐겁다고느끼고 복전하고싶었는데
    저 이유때문인거같네요 ….
    고3때 1문제잡고 몇시간 푼 기억이..

  8. IQ 퀴즈 답은 11. 마주보는 칸의 숫자 차이가 일정하다는게 규칙인 듯 하네요 ~

  9. 좋은 글 너무 감사합니다.
    축구 운동하는 아들(5학년)이 있는데, 훈련은 정말 잘 하지만 실제로 경기에 가면 당황하고 몰입(집중)이 안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몰입이라는 글에 대하여 읽으면서 아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 라는 생각도 들지만 아들에게는 앞으로의 비전에 대한 아주 중요한 시점이라고도 볼 수 있어서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혹시 좋은 생각이 있으시면 나눠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몰입이 어떻게 생성되는가에 관심이 있어서 뒤적거리다가 좋은 글을 발견하였습니다.
      ……..

      이기려는 마음이 너무 강해도 몰입을 방해합니다.
      게다가 나보다 강한 선수를 만나면 난국이 연출됩니다.

      그래서 즐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즐기는 마음이 강하면,
      강한 선수를 만나도……. 능력 범위 안에서 가능한 방법들을 유연하게 찾거든요.
      협동을 이용한다든가……..순간적인 오버히트를 한다든가……

      그런데 어린 축구 선수들의 즐기는 마음을 키워주려면…….
      실패도 성공과 같은 비중으로 존중받았던 경험에서 싹틉니다.
      실패했더라도….. 열심히 노력한 과정을 존중해주고…….격려해주면 됩니다.

      질책을 받거나 야단맞는 경험이 많으면 즐기기 힘듭니다.
      잘했을 때 뿐만 아니라 찰못했을 때에도 섬세한 격려와 따뜻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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