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의 시작

요즘 많이 바쁘다. 내 글을 쓰기는 커녕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시간도 없다. 아니, 이제 그런 내용에 이전에 비해 관심이 덜해졌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한때는 할 일이 없어 고민이었는데, 요즘엔 이 많은 일들에 내 시간을 어떻게 분배해야 할까가 더 고민이다.

약 1년 반 전, 5년 반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떠나기 2주 전쯤 매니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인수 인계를 마치고 여유 있는 며칠을 보낸 후, 2014년 11월의 금요일 오후 따듯한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눈부시던 날에 짐을 정리해서 회사 건물을 나왔다. 한때는 럭셔리한 회사 건물과 드넒은 호수, 그리고 그 호수를 내려다보던 내 사무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마침내 몇 년간 기다리던 영주권을 받고, 나만의 일을 하기 위해 회사를 떠날 때는 그렇게 홀가분하고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서, 함박 웃음을 짓고 매니저와 악수했다. 그는, 언제든 원하면 돌아오라고 했지만 나는 속으로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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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 쇼어즈(Redwood Shores)의 오라클 본사. 내 사무실은 왼쪽에서 세 번째 빌딩 3층에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큰 회사에서 내 자리 하나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마음 고생하고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MBA 졸업 즈음인 2009년 여름은 정말 쉽지 않은 시기였다. 2007년 입학할 당시에는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어도비, 골드만 삭스, 맥킨지 등에서 활발히 선배들을 채용해갔는데, 학교에 입학하고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사건이 터졌다 (영화 ‘빅 쇼트‘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그 때는 그게 뭔지도 잘 몰랐다. 그냥 일시적으로 경기가 안좋은 것이겠거니 했다. 산타모니카(Santa Monica)에서 출발해서 웨스트우드(Westwood)에 위치한 학교에 가는 약 15분 동안 라디오를 듣고는 했는데, 2008년 겨울이 되자 매일 ‘오늘 주가가 바닥을 쳤습니다’, ‘실업률이 오늘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라는 이야기뿐이었다.

MBA 입학한 2007년 여름(왼쪽 끝)부터 2009년 여름(오른쪽 끝)사이의 S&P 500 지수 변화 (출처: Google Finance)

해외 취업 비자 소지자들이 줄줄이 해고되고 있는 마당에 외국인 학생으로서 인턴십을 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자&컴퓨터 공학을 전공했고, 성장하는 스타트업에서 일을 했다는 사실 덕분에 인터뷰 기회는 종종 얻었지만, 긴장하고 준비하던 인터뷰마다 때로는 실력 부족으로, 때로는 영어 부족으로, 때로는 핏(fit)이 맞지 않아 번번이 떨어졌고, 마이크로소프트와의 인터뷰에서 ‘게임을 마이크로소프트 자체 스튜디오에서 더 많이 개발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외부 개발사와 협력하는 것이 더 좋은가’라는 질문에 쩔쩔 매고 부족한 영어로 더듬더듬하며 바보 같은 대답을 하고 나왔을 때는 정말이지 내 자신이 싫었다. 보통 MBA 1학년이 절반이 지나는 시점부터 인턴십을 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첫 여름 방학이 다가오는 때 즈음에는 90% 이상의 학생들이 인턴 오퍼(offer)를 받는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오퍼가 없었다. 한국에서 그 고생을 해서 G-MAT 시험을 보고, 에세이를 쓰고, 겨우 합격을 받아서 와서 천문학적인 돈을 쓰고 있는데 인턴십을 구하지 못했다. 간간이 오는 인터뷰 요청이 내가 희망의 한줄기를 잡고 하루 하루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었다. 하지만 번번이 오는 거절 메일은 나를 낮아지게 했다.

결국 1학년 수업을 모두 마치고, 모두가 인턴십을 위해 각 도시로, 각 나라로 떠난 6월 말, 나는 레주메를 고치며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그 때 인튜잇(Intuit)과 썬 마이크로시스템즈(Sun Microsystems) 두 곳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고, 나는 극적으로 썬에서 오퍼를 받았다. 그리고 바로 수락했다. 시간당 임금과 연봉이 적혀 있던 그 편지가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월급 700만원이 넘는, 내 가난한 마음을 달래주기에 충분히 좋은 조건이었다.

여름 인턴십 오퍼 레터

여름 인턴십 오퍼 레터

인턴십을 풀타임으로 바꾸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고, 당시 매니저인 파람(Param)이 나를 좋게 봤고, 또 그 위 VP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은 덕에 인턴십을 마치고 다시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계속 파트타임으로 일을 했고, 결국 풀타임 오퍼로 전환할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오라클과의 합병이 발표되고난 후 채용이 전면 금지되어서, 파람은 내 이력서를 들고 EVP(Executive Vice President)까지 찾아가서 설득해야 했다고 한다. EVP라고 하면 당시 3만명의 직원 중 상위 10명 정도에 불과한 직급이었다. 2008년 여름 인턴십 오리엔테이션 때는 20여명 정도 사람이 있었는데 2009년 여름, 학교를 졸업하고 오리엔테이션을 받기 위해 갔을 때는 풀타임은 나 한 명이었고, 인턴십을 시작하는 한 명이 있었다. 당시 인사 담당자는 ‘당신이 어쩌면 썬 마이크로 시스템즈가 마지막으로 채용한 직원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I think you are the last person to be hired at Sun)’라고 웃으며 서류를 건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실리콘밸리 테크 회사의 정식 직원이 되었다.

Sun Microsystems (현 오라클) 본사 캠퍼스

언제나 깔끔하게 손질된 잔디와 높은 야자수가 아름다웠던 Sun Microsystems (현 오라클) 본사 캠퍼스

James Gosling! The father of Java Language. I was in the same meeting with him. Unbelievable!

자바(Java) 언어 창시자인 제임스 고슬링(James Gosling)의 옆자리에 앉아 회의를 하던 날은 내 삶에서 가장 신기한 순간 중 하나였다.

그렇게 우여 곡절 끝에 얻은 기회였지만 떠날 때는 미련이 없었다. 회사 다니는 동안 조금씩 엔젤 투자를 하며, 그리고 너무나 멋지게 세상을 디스럽트(disrupt)하는 실리콘밸리의 회사들을 보며, 사업이라는 것이 쉬워 보였고, 원칙에 충실하고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나도 얼마든 멋지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회사를 떠난지 세달 후인 2015년 봄, 나는 우울증 증세를 경험했다. 세상에 흥미로운 일은 하나도 없었고, 무엇보다, 세상에 내가 해야 할 일이 없었다. 내가 1년동안 품고 있던 아이디어는 내가 가장 큰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관련 지식이나 경험 또한 참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쉽게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하나 하나 다 어렵게 느껴졌다. 작은 결정 하나를 위해 오래간 고민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렇게 고민하거나 불필요하게 쓰는 시간들이 이제는 모두 급여에 해당하는 기회비용으로 환산된다는 것이었다. 하루를 별 소득 없이 보내면 몇 백달러어치의 돈이 날아간 셈이었고, 1주일을 진전 없이 보내면 몇 천 달러를 날린 셈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차 한대를 살 돈이 날아갔다. 내 시간의 비용이 정말로 크게 느껴졌고,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실리콘밸리의 살인적인 물가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첫 아이는 2살을 갓 넘겼고, 태어난 지 1개월이 된 둘째는 나와 아내의 보살핌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라이너(Liner)라는 모바일 웹페이지 하이라이팅 앱을 만든 아우름플래닛 창업자들을 만났고, 산호세의 한 아파트 거실에 앉아(서울에서 만났을 때는 곱창을 먹으며) 끝내주는 제품을 만드는 재미를 누렸다. 그렇게 몇 달을 함께 일한 후 우리는 앱을 프로덕트헌트(Product Hunt)에 런칭했고, 총 512표를 받아 당일 2등으로 마감했다. 흡사 승마 경기를 보는 듯 흥분되는 하루였다.

L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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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Alive라는 모바일 비디오 에디팅 앱을 만든 뛰어난 팀, 매버릭(Maverick)과도 함께 일했는데, 긴 호흡을 가지고 진지하게 사업에 임하고, 밤낮 없이 일하며 결과를 만들어내는 오주현 대표를 비롯, 공동창업자들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다.

작년 여름, 서울에 방문하는 동안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열린 스파크랩스 5기 데모 데이를 구경했다. 스파크랩스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멘토중 한 명으로서 그간의 과정을 지켜봤고, 그와 함께 스파크랩스를 지켜간 많은 회사들 또한 지켜봤기 때문에 그 날의 데모 데이는 그 전부터 봐왔던 것이고, 이전보다 좀 더 커지고 화려해졌다는 것 말고는 그다지 특이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달랐다. 데모데이가 진행될수록, 그 스테이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동안 만든 프로토타입과 함께 스파크랩스 6기 엑셀러레이터 프로그램에 지원했고, 6기 프로그램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네달 후, 내가 그 스테이지에 섰다. 그리고 팀원들과 함께 3개월동안 공들여 만든 제품을 발표했다. 제품의 이름은 차트메트릭(Chartmetric) – 음악과 데이터의 결합.

데모데이를 마친 후 고맙게도 좋은 분들이 회사에 투자도 해 주셨고, 좋은 사람들도 만나 함께 일하게 되었다. 이제 걸음마고 시작이다. 앞으로 이 블로그를 통해 조금씩 내 경험과 배움을 나누고, 그런 경험들이 다른 분들에게 도움을 주면 좋겠다. 돌이켜보면,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고, 그들 모두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고, 또 그에 보답하고 싶다.


공지: 이 블로그에 방문하시는 분들과 조금 더 캐주얼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슬랙 채널을 하나 만들어볼까 합니다. 주제는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엔젤 투자 등입니다. 물론 가끔 좋아하는 음악을 공유할 수도 있겠지요. 관심 있는 분은 여기에서 간략히 정보를 입력해주세요.

12 thoughts on “사업의 시작

  1. 조성문님, BAKG소풍 때 뵙고 링크드인으로 인사드렸던 대학생인데 기억하실런지요? 요즘 새로운 글을 자주 접할 수 없어 ‘사업이 바쁘시고 잘 되고 계시나보다’ 생각하며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귀국하고, 취업 후에 연락 드리고 싶었는데(창업하신 회사의 채용공고도 보고요 🙂 ) 바쁘신 것 같아 또 연이 닿기를…하며 지냈는데, 오랫만에 글로 뵈니 반갑고 여전히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물론 알죠 희원님. 그 때 딸하고 놀아줘서 얼마나 고마웠는데.. 사업이 바빠서 글을 못썼다기보다는 그동안 공개적으로 글을 쓰기가 참 힘들었어요. 고민도 많았고.. 지금이라고 고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용기 내서 publish해보기로 했어요. Give me an opportunity to help you someday.

  2. 실리콘밸리의 한국인 컨퍼런스할때 성문님이 별로 기분이 안좋아보여서 마음고민이 심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사람인데 왜 그러나 했죠. ㅎㅎ 이해합니다. 본인의 열정을 바칠 일을 찾았다니 축하합니다. 파이팅입니다.

    • 네 그 때 사실 쉽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남들이 다 부러워한다니 그 말만으로도 기분이 좋네요. ^^ 저는 부러운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만.. 응원 고맙습니다!

  3. IT에 종사하진 않지만 항상 스크랩 하면서 읽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쓰신 글들에 많은것을 느끼기도 하고요.. 하시는 일이 더욱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글 남겨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4. 안녕하세요. 조성문 님
    저는 2012년 경에 본 site를 접한 후
    나름 꾸준히(?) 방문하여 올려주신 글들 잘 보고 있습니다. ^^
    타국에서의 생활 등…흥미진진한 이야기, 생경한 이야기 등등..생생하게 읽혀서 참 좋았습니다.
    대업을 준비 중이신가 보내요. 결심 축하드리고요.
    큰 결실 이루길 기도하겠습니다.
    승리 이루는 매일이 되시길 바랍니다.
    ^_^

    재미있는 글도 자주 올려주세요.~ ㅎㅎㅎ

  5. 안녕하세요. 저는 스타트업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박사과정 학생입니다. 인사이트있는 글에서 항상 많이 배우고 있어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최근에 프로덕트헌트가 스타트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몇가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ohchan.kwon 앳 쥐메일 로 연락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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