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제품이다

한밤중에 거실을 왔다 갔다 하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끄적끄적. 나중에 내가 성공해서 내 돈으로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사람이 된다고 하면 절대 투자하지 않을 회사는 제품은 그저 그런데 수상 실적이 많고 CEO의 말발이 좋은 회사이다.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의 도움을 받고, TechCrunch Disrupt, SXSW 같은 행사에 나가서 투자자들에게 피치하고 수상을 하는 것도 물론 의미 있는 일이고 쉽지 않은 일이지만, 회사의 주된 경력이 그런 것들이라면 정말 경계해야된다. 투자자들에게 ‘보여주기’ 위주의 제품을 만들다보면 실제 고객들과는 점점 멀어지게 되고, 결국 자꾸 이상한 곳으로 가게 된다. 유행에 따르고, 투자자들이 좋아할만한 기능들만 자꾸 추가된다. 더 위험한 건, 수상 경력과 상금 때문에 마치 회사가 돈이 많고 잘 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소셜 네트워크는 싸이월드가 먼저 개척했기 때문에, 한국의 환경이 좋았더라면, 그리고 정부와 투자자들의 뒷받침이 있었더라면 오늘의 페이스북 자리를 싸이월드가 꿰차지 않았을까라는 가정을 이야기하는 분들이 간혹 있는데, 전혀 공감할 수가 없다. 당시 싸이월드와 페이스북 초기 버전은 제품의 질 측면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창업자 분께는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클릭할 때마다 새로운 팝업이 뜨고, 사진은 항상 작은 크기로밖에 볼 수 없는 제품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전 세계 유저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모두 카리스마를 지닌 CEO들이며, 애플과 테슬라, 그리고 SpaceX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을 보유한 위대한 회사들이다. 하지만, 아이폰을 샀는데 6개월만에 속도가 현저히 느려진다면? 테슬라 차를 샀는데 3개월만에 손잡이가 녹슬기 시작한다면? 수백조원의 기업 가치를 지녔다 할지라도 제품에 문제가 자꾸 나타나면 그 수백조원이 증발해 버리는 건 하루 아침의 일이다. 최근 일론 머스크라는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내가 가장 주목한 부분은 얼마나 일론 머스크가 제품에 집착했는가이다. SpaceX에서도 그렇고 테슬라에서도 그렇고, 비정상적이리만큼 제품의 디테일에 신경썼다. 테슬라의 알루미늄 바디, 17인치 LCD, 자동으로 나오는 문 손잡이, Telsa X의 위로 열리는 문, 우주로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로켓 등. 엔지니어들은 안된다고, 싫다고 한 일을 그는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리고 제품의 그런 특징들이 소비자들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CEO의 소셜 네트워크 팔로워 숫자, 카리스마와 자금 조달 능력, 그리고 네트워크 등등은 모두 회사 성장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좋은 제품’만큼 길게, 그리고 넓게 갈 수는 없다. 사람의 말은 겨우 100미터밖에 못가지만 글은 10,000km를 여행하고, 또 1,000년 이상을 살아있을 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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