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 (Flow)

지난 몇 달동안 ‘몰입‘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 출연했던 황농문 교수의 ‘공부하는 힘, 몰입이라는 강연을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자신이 지도했던 많은 학생들이 몰입을 연습하고 경험하면서 공부를 즐기게 되고, 결과적으로 학교 성적도 좋아졌다는 사실을 공유한 것인데, 학생들이 보냈다는 이메일을 하나 하나 보며 참 감동이 되었다. 그는 몰입의 경험을, ‘처음에는 도저히 못할 줄 알았는데 혼신의 노력 끝에 결국 해냈다‘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의도적인 도전과 응전의 경험인데, 이런 성공 경험을 반복할 때마다 불연속적으로 성장하며, 더 많이 반복할수록 좋다고 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나는 몰입을 경험하며 살고 있는가. 종종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내가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고 느꼈던 시기가 몇 번 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고등학교 때이다. 영어를 일찍부터 공부했던 덕에 운좋게 외국어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내 실력은 친구들에 비해 한참 뒤져 있었다. 첫 시험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야 했고, 그 때 내가 택했던 방법은, 오로지 공부만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내 머리가 비상한 게 아닌 바에야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문제는 친구들 모두 학교에서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공부한 후, 밤 11시에 또 학원이나 독서실에 간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더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쉬는 시간을 활용하고, 자습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자습 시간에는 항상 계획을 짜 놓고 시작했다. 마라톤이 아니라 100미터 달리기를 여러 번 하는 심정으로 공부했다. 그러다보면 자습 시간에 너무 바빴다. 그러고 나서 밤 11시가 다 되어 학교를 나오면서 캄캄한 하늘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피곤하고 지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신이 나고 힘이 솟았다. 자습시간이 끝나버린게 아쉽다고 생각했다.

내가 고등학교 때 공부가 재미있었다고 하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로 난 공부가 재미있었다. 뭘 외우고 문제를 푸는 게 재미있었다기보다는, ‘몰입’이 나를 즐겁게 하고 나에게 에너지를 주었던 것 같다. 몇 시간, 며칠동안 완전한 몰입을 경험하고 나면, 다음의 몰입이 기다려지고 더 큰 과제에 도전하고 싶어진다.

대학교에 입학하자 놀기에 바쁜데다 동시에서 신경써야 할 일들이 크게 많아지며 몰입할 기회는 많이 없어졌다. 그러다가 3학년 때 까다로운 전공 과목들을 공부하며 다시 몰입을 경험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수업이 문수묵 교수의 ‘자료구조 및 알고리즘 (Data Structure and Algorithm Analysis)’이었는데, 까다로우면서도 오랜 시간 생각해야 풀 수 있는 과제들이 많아 답을 찾기 위해 10시간동안 컴퓨터실에 앉아 코딩하곤 했던 기억이 있다. 한 번은 밖이 시끄러웠는데 그런 것도 모르고 한참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보니 학교 축제 기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적도 있다.

게임빌 초기 시절도 몰입의 연속이었다.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까다로운 문제가 항상 발생했고, 거의 대부분 정해진 답이 없었다. 오랜 시간동안 고민하고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 때는 도서관에 가서 앉아 있곤 했다. 그러다가 결국 답을 못 찾고 전문가의 도움을 빌려야 할 때도 있었지만.

MBA를 거쳐 미국 대기업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이 닥쳤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가끔씩 몰입을 경험하곤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학교에 다닐 때처럼 몰입을 경험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다.

타파스 미디어(Tapas Media) 창업자인 김창원씨가 2010년 말에 그의 블로그에 ‘몰입지점‘ 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는 이 글에서, ‘우리 대부분은 직장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타들어가다 만 젖은 장작처럼 완전히 몰입해서 일하지 못한다’며, ‘내가 어떤 프로젝트를 할때 정말 내 자신을 잊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팀을 이루어 몰입하고 빠져들어서 할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들의 직업적 여정은 결국 그런 몰입상태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어야 한다‘고 글의 결론을 내렸다. 그 모든 말에 크게 공감한다.

몰입을 어떻게 하면 경험하고 훈련할 수 있는가? 황교수가 자신이 지도하던 박사과정 학생 중 한 명에게 권했던 방법 중 하나는 6개월동안 중고등학교 수학 문제집을 풀어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열심히 이를 따랐고, 몰입을 훈련했다.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회사에 취직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회사에 있었던 기술적 문제를 몰입적 사고로 훌륭히 해결하여 임원들에게 크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례를 소개했다. 문제를 해결하는 연습을 꾸준히 해 두면, 이를 다른 분야에도 곧 적용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지적 재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교육 방법으로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 이 강연 마지막에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황농문 교수의 강연을 들은 후에, 오랜만에 고등학교 수학 문제집을 펴 보았다. 고등학교 수학 문제와 더불어 IQ 테스트 문제집도 보기 시작했다. 까다로운 문제들을 골라 오랫동안 생각하고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확실히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IQ 테스트 문제 중 하나
IQ 테스트 문제 중 하나: 물음표에 들어갈 숫자는?

꼭 이런 문제를 푸는 동안에만 몰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같은 경우는 블로그를 쓰는 과정 중에도 몰입을 경험한다. 이 블로그에 쓴 글 중 많은 것들은 오랜 시간동안 골똘이 ‘왜 그럴까’를 생각하다가 나름대로 답을 찾았을 때 쓴 경우가 많다. 그 과정이 일종의 몰입이었고, 마침내 정리가 되어 정신 없이 타이핑을 하는 동안 몰입을 경험하곤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몰입’을 수십 년동안 연구했던 칙센트 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는 Flow라는 책에서, 사람들은 몰입을 경험할 때 가장 행복하며(people are happiest when they are in a state of flow), 이 몰입이란 ‘어떤 활동이나 상황에 완전히 빠져들어 집중하고 있는 상태(a state of concentration or complete absorption with the activity at hand and the situation)’라고 설명했다. 아래는 그의 유명한 몰입 다이어그램이다.

몰입 다이어그램. 자신의 실력이 높고, 해결하려는 문제도 어려울 때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몰입 다이어그램. 자신의 실력이 높고, 해결하려는 문제도 어려울 때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스마트폰 덕분에 우리 삶이 많이 편리해지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몰입에 투자할 시간이 적어져서 우리의 행복 지수가 낮아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상 생활에서 충분한 몰입을 경험하고 있지 않다면, 고등학교 수학 문제집을 한 번 펴보는 것은 어떨까.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 가족 중심 문화의 중요성

스파크랩(Sparklabs)에서 주최하는 넥스트 컨퍼런스(The Next Conference)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서울에 다녀왔다. 스파크랩은 버나드 문(Bernard Moon), 이한주, 지미 김(Jimmy Kim) 세 명이 함께 만든 스타트업 인큐베이터인데, 마크 큐번(Mark Cuban)이나 빈트 서프(Vint Cerf)같은 유명인들을 멘토로 섭외했고, 그 외에 100여명의 멘토를 통해 한국의 스타트업이 세계로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선정되면 2만 5천 달러의 투자와 함께 무료 사무 공간 및 호스팅 등을 지원하며, 노리(KnowRe), 미미박스(Memebox), 아블라 컴퍼니(Ablar Company) 등이 포트폴리오 회사이다. 컨퍼런스에 참석한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도 좋았고 컨퍼런스 내용도 좋았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꼭 내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연사들 대부분이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 과정 중에 다양한 이벤트가 있었다. 원래 서울에 오래 살았었지만, 캘리포니아에 살다가 서울에 가면 몇 가지 대조적으로 느끼는 것들이 있다.

  1. 뿌연 하늘
  2. 친절하고 일처리가 빠른 직원들
  3. 세련된 도시 분위기
  4. 표정이 어두운 사람들

표정이 어두운 사람들“. 택시를 타든, 지하철을 타든, 길거리를 걷든, 표정이 어두운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당신은 진정 행복하십니까?“라고 질문하면, “글쎄요. 그냥 사는 거죠.” 라고 대답할 것 같은 사람들. 점심 시간이 끝날 즈음이면 삼삼오오 모여서 회사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더 어둡게 보였다. 삶의 모든 스트레스와 무게를 혼자 감당하느라 지친 사람들처럼.

택시 운전사들은 특히 더 심했다. 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택시를 탈 때마다 모든 운전사가 “어느 길로 갈까요?”를 물었다. 참 의아했다. 어떤 길로 가면 좋을지는 운전하는 사람이 더 잘 아는거고, 나는 어차피 길도 잘 몰라 택시를 탄 건데 왜 나한테 길을 물을까? 이유를 물었더니 그걸 안 물어보고 그냥 갔다가 차가 막히거나 요금이 조금이라도 더 나오면 손님들이 난리를 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차선을 지정해주기까지 한다니 어이가 없었다. 운전사에게 스트레스를 주면 자신이 위험하지 않을까? 아들을 이미 장가보냈다는, 50이 넘은 한 운전사에게 그 분의 삶을 들었다.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 점심시간을 포함해서 하루 18시간을 일하는데, 비싼 기름값을 제외하고 집에 가져가는 돈이 하루 10만원이란다. 워낙 고된 노동이기 때문에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데, 그렇게 한 달간 20일을 일하면 200만원이다. 거기서 보험료, 감가 상각, 차량 유지비 등을 제외하면 160만원이 남는다. 그런 중노동에 대한 대가가 월 160만원이라니. 6년 전에 정부에 의해 정해진 택시 요금은 지금은 너무 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릴 때 팁으로 천원을 드렸더니 ‘어, 이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하며 진심으로 기뻐하셨다. 그 주름진 눈가에 가득 번진 미소를 보자 눈물이 났다.

그런 분들을 보며,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돈이 많다고 행복한 건 물론 아니다. 시간이 많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필요 조건들일 뿐이다. 미국에서 동료들이나 친구들을 보면 행복한 사람들이 참 많은데, 한국의 중견 기업이나 대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를 행복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왜 상대적으로 적을까? 무엇이 다를까에 대해 생각해 봤다.

나는 그것이,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캘리포니아에 살면 뭐가 좋느냐고’ 묻는다. 심심하지 않느냐고도 한다. 사실 6년간 미국에 살면서 심심하다고 느껴 본 적은 없다. 그러면 나는 날씨가 좋아서라고도 하고, 여행할 좋은 곳이 주변에 많이 있어서라고도 하고, 차가 안막혀서라고도 하고, 주말에 결혼식과 부고 등 의무적으로 참석할 경조사가 없어서라고도 하는데, 그 모든 것이 내가 캘리포니아에 사는 것을 즐기는 이유가 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이다.

처음 실리콘밸리에서 일을 시작했을 땐 일보다 가족을 중시하는 문화 때문에 놀라고 어이가 없었던 적이 많았다. 한 번은 목요일 오후 4시에 팀 전체가 모여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한 임원이 회사 상황에 대해 업데이트를 하다가 5시가 되자 갑자기 “어이쿠, 아들 픽업하러 갈 시간이 되었네요.”하며 급히 회의실을 나갔다. 좀 황당했다. 아이 픽업 때문에 말을 하다 끊고 회의실을 나가다니 가족의 중요성이 참 크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생기자 그런 문화가 더 피부로 느껴졌다. 아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리자, 스웨덴 출신의 내 전 매니저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I do not expect to see you for two weeks once your kid is born. Don’t even try to email me. If you are gone for two weeks, I would assume that your child was born.” (아이가 태어나면 2주 동안은 회사에 나올 생각 하지 마세요. 연락도 안해도 됩니다. 갑자기 소식이 끊기고 회사에서 사라지면 아이가 태어났다보다 할게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보스턴 출신인 지금의 매니저도 마찬가지이다. 아이가 태어난 후부터는 항상 “How is your baby? How is your wife? (아이는 어때요? 아내는 건강해요?)” 하며 아이와 아내에 대해 묻는 것으로 회의를 시작한다. 그에게는 아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아이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아이 이야기를 하면 무척 재미있어 한다. 그래서 그와의 대화가 항상 즐겁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아이를 출산하거나 입양하면 아빠에게 향후 1년간 쓸 수 있는 7주의 휴가를 보장한다. 출산 휴가라기보다는 ‘아이와 친해지는 시간’이라는 의미에서 본딩 타임(bonding time)이라고 한다. 이게 재미있는게, 회사에서는 무급 휴가로 처리하므로 부담이 전혀 없고, 캘리포니아에서 월급의 55%를 지급한다. 나머지 45%는 회사에서 복지 차원으로 내주기도 하고, 남은 휴가 일수로 보충하는 방법도 있다. 나 역시 100일 전에 아이가 태어난 덕에 출산 휴가를 쓸 수 있게 되었고, 이번에 한국에 갈 때 그 7주 중 2주를 사용했다. 아래는 휴가를 사용하기 전에 매니저와 했던 대화이다.

“출산 휴가 7주 중 2주를 이번에 쓰려고 합니다.”

“아, 그래요? 왜 2주만 써요? 7주 다 쓰지 그래요?”

“그것도 좋은데, 한꺼번에 쓰는 것보다는 2주 정도씩 나눠서 쓰는게 일에 지장도 적고 저한테도 더 쓸모가 있어서요.”

“그래요? 좋습니다. 하지만, 그 7주를 꼭 다 쓰도록 하세요. 그걸 남겨서 당신에게 이득되는 것도 없고, 회사에도 득이 없으니 말이에요.”

그래서 아무 부담 없이 2주 휴가를 얻었고, 나머지 5주는 가족과 한국에 한 번 더 가거나 유럽 여행을 하는데 쓸까 하고 있다.

이렇게, 미국에 살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나 역시 가족과 시간을 많이 쓸 수 있고, 그런 시간에는 진정으로 행복을 느낀다. 2년간의 신혼 생활을 캘리포니아에서 했다는 사실을 나는 축복으로 여기고 있다. 물론, 미국 사람들이라고 모두 그런 행복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전략 컨설턴트나 뉴욕의 뱅커들은 주당 120시간 이상을 일하므로 가족과의 시간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한 희생이 당연시되지는 않는다.

반면, 한국에서는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주중에는 거의 항상 야근이다 회식이다 뭐다 해서 저녁 약속이 있고, 주말에는 결혼식, 초상집 등 각종 경조사에 참석해야 한다. 나도 서울에 살 때 경조사에 참 많이 참석했는데, 정말 시간 낭비 돈 낭비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친하지도 않은 친구나 동료가 초대한 결혼식이나 돌잔치에 참석하는 건 고역이었다. 더구나 그런 결혼식이 지방에 있을 때면, 굳이 교통비 4만원을 써서 결혼식에 가서 5만원 부조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 한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이전에 일하던 회사의 사장이 상을 당했다고 한다. 직원들이 경쟁하듯이 장례식장에 갔는데, 어떤 직원은 비행기를 타고 갔다고 한다. 나중에 일이 정리되고 나서 회식 자리에서 그 사장이 “아, 누구누구가 제일 일찍 왔는데 기억에 남더라구. 역시…” 라며 장례식장에 왔던 직원 한 명 한 명을 기억하고 이름을 언급했다고 한다. 참…

나도 한국에서 결혼을 했고, 결혼식에 600명이 넘는 하객들이 참석했지만, 내 결혼식에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왔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실 일부 손님들은 그냥 인사 치례로 온 분들이었다. 그런 분들은 결혼식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빨리 결혼식 끝나고 식사 하고 나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보통 결혼식보다 조금 길었던 2시간의 식이 끝나고 나서 인사하러 가니 몇 테이블은 비어 있었다. 아마 토요일이라 다른 결혼식이 또 있어서 가야 했나보다.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소중한 휴일과 주말을 반납하고 그렇게 결혼식에 찾아다니는 것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주중 저녁 약속이나 주말 경조사가 없어도 나는 아내와 딸과 보내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데, 그런 일들로 시간을 다 빼앗기고 나서 주말을 잠 보충에 사용한다면,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대체 어디서 나올 수 있을 지 모르겠다.

곤히 잠든 아내와 딸의 모습을 보며 느끼는 행복보다 큰 게 없다. 가족과 하는 시간을 빼앗긴 채 친구나 동료들과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시면 과연 행복할까? 그렇게 취한 상태로 집에 들어와서 아내가 늦게 들어온다고 스트레스를 주고, 아이가 술냄새난다며 아빠를 배척하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보통 미국은 ‘개인 주의’이고, 한국은 ‘집단 주의’라고 이야기한다. ‘개인 주의(individualism)’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조직의 이익을 희생한다는 부정적인 어감이 들어 있다. 나는 그 개인주의를 ‘가족 주의(familism)’라고 바꾸고 싶다. 미국에서 ‘개인주의적이다’라고 폄하되는 많은 일은, 사실 가족을 위한 일이다. 김현유씨도 블로그에서 한국과 미국의 문화 차이를 설명하며 ‘가족 중심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거기에는 개가 아프다고 해서 집에 일찍 가는 동료의 이야기가 나온다. 개가 아프다며 조퇴하다니,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라며 비판할 상황이다. 하지만, 개가 가족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가족이 아픈 것이고, 가족이 회사보다 우선시되는 문화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인간은 누구나 개인주의적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산다. 조직을 위해 개인을 희생한다고 하지만, 따지고 들어가보면 개인의 성공을 위해 (회사에서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나는 이 정도로 가족을 희생할 만큼 회사를 위해 충성을 다한다’라는 이미지만큼 윗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것이 있을까? 윗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결과로 승진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개인주의가 아니고 무엇인가.

얼마 전에는 ‘창조경제는 저녁이 있는 삶에서 시작된다‘는 유병률 기자의 글을 읽고 공감이 되어 트위터에 올렸다. 여기에서는 스티브 워즈니악, 마크 저커버그, 래리 페이지 모두 아버지의 영향으로 위대한 인물이 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나친 확대 해석이나 논리 비약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 아이에게 아버지만 할 수 있는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은 정말 크다. ‘남자는 밖에서 돈을 벌고 여자는 집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당연시되어서는 안된다.

안타깝게도, 이런 대부분의 주장은 일시적인 파장을 일으키는데 그친다. 작년 대선 때 손학규씨는 ‘저녁이 있는 삶’을 내세우며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지난 2013년 4월 손 고문은 “그러나 이를 제도적으로 수용하기에는 우리사회의 준비, 특히 정치적 준비가 아직 덜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사실상 달성 불가능한 목표임을 인정한 셈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 준비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는 ‘부하 직원의 저녁 시간과 주말 시간을 빼앗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상사들의 생각’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한국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어서 이 분위기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 사장부터, 임원부터 일찍 퇴근해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 자연스럽게 저녁이 있는 삶이 생길 것이고, 사회 전체의 행복도가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사는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리고 훌륭한 인재들이, 바로 이 점때문에 한국에 돌아가는 것을 꺼린다. 나는 ‘베이 에어리어 K 그룹 (Bay Area K Group)‘ 이라는 실리콘밸리 한인 모임의 이사회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2천명이 넘는 회원들을 만나보면, 비록 나를 비롯해서 모두 이민자로서 미국에 살고 있지만, 행복한 분들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실리콘밸리에서 엔지니어들에 대한 대우가 좋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가족과의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고액 연봉을 제시하더라도 그 분들이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못하거나, 돌아가더라도 곧 미국으로 다시 나오게 되지 않을까.

누군가와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다 황산벌 전투로 유명한 백제의 계백 장군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어렸을 때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던 위인이었고, 그의 이야기를 통해 깊은 감명을 받았기에 기억이 난다. 계백 장군의 일화에서 가장 크게 부각되는 것은, 전쟁을 나서기 전 아내와 아이를 자신의 칼로 죽였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처절하고 결연한 심정으로 전쟁에 임했고, 그 때문에 5천밖에 안되는 군사만으로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상대로 네 차례나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숫자에 밀리고 기술에 밀려 싸움에 패하고 백제는 신라에 의해 짓밟히고 말았지만. ‘용맹한 싸움’만을 생각하면 가슴 뭉클한 이야기이고, 배울 점이 많은 위인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아무리 ‘대의’를 위해서라도 그렇지 아내와 아이를 죽인다는게 말이 되는가? 전쟁에서 이겨야 하는 이유는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인데, 가족을 지키기는 커녕 자신의 손으로 죽인다는 건 이해할 수 없고, 이런 행동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것은 정말로 위험한 일이다. 좀 찾아보니 지금도 ‘소년 한국일보‘ 등을 통해 이 이야기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까지 죽이고 굳은 결심으로 백제를 구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최후를 맞은 계백 장군. 장군의 큰 조국애와 충성심은 130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라는 김남석 작가의 평가와 함께 어린 아이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끔찍한 일이다. 내가 보지는 않았지만, 영화 ‘황산벌’에서는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고 한다.

이 염병할 인간아. 니가 가장이라고 해준 것이 뭐가 있어? 평생 전장터로 싸돌아 다니고 자식새끼들 싸질러 놔놓기만 했지 해준것이 뭐가 있어?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뒈지는 것이고, 사람은 이름때문에 뒈지는 거야! 뒈질라면 너나 뒈져. 내 생때같은 자식들은 가만 놔두고!

표현이 좀 격하기는 한데, 나는 아내의 이 말에 틀린 점이 없다고 생각한다. 생때같은 자식들을 왜 죽이는가? 역사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계백 장군의 부인이 그 상황에서 ‘그래요, 당신을 위해, 그리고 당신의 조국을 위해 저와 아이는 희생하겠어요’라며 계백 장군의 칼에 스스로 목을 대었을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아마 울며 불며 자신은 죽이더라도 제발 아이들만큼 살려달라고 애원했을 것이다.

가족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지금의 한국의 문화, 혹시 계백 장군의 모습을 미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국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미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사촌 동생과 통화를 했다. 이제 막 돌이 지난 아들을 두고 3개월간 사우디 아라비아의 오지로 출장을 가야 한다며 울상이었다. 일 자체의 속성상 출장이 잦고, 특히 중동 지역에 가야 할 일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막 돌을 지난 아이를 둔 아빠를 3개월이나 출장을 보내는 상사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 그래야 한다면 아내와 아이의 비행기 티켓과 호텔 숙박비까지 함께 주면서 가족이 헤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촌 동생은 ‘회사 생활을 하자면 그 정도의 희생은 각오해야 한다’라며 받아들이고 있는데, 상황이 이해가 되면서도 너무나 안타까웠다.

행복은 본능을 만족시키는 데서 오는 것이다. 먹고 싶은 욕구, 쉬고 싶은 욕구, 그리고 놀고 싶은 욕구들이 충족되면 행복하다. 여기에 더해, 사회적 성공을 거두고 남들이 인정해주면 행복하다. 그렇지만 가족이 빠진 행복은 반쪽짜리라고 생각한다. 특히, 아내와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에서 오는 행복은,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사회적, 경제적 성공에서 오는 행복과 비교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행복의 요소를 빼앗긴 채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업데이트(6/24): 윤석찬님이 쓴 “나의 가족과 저녁이 있는 삶“도 같이 읽어보세요. 한국에서 가족 중심의 삶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아이에게 아빠의 삶을 오픈한다는 것이네요. 한국에서 이게 얼마나 현실적인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있는 곳에서는 직원 개개인마다 모두 각자 사무실이 있어서, 사람들이 아이들을 회사에 자주 데려옵니다. 회의하는 동안 사무실에서 숙제하고, 점심 시간에 뛰어다니고 그러죠.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도 회사에 데리고 와서 같이 일하는 마당에.. 주말에 캠핑하는 아이디어도 참 좋은 것 같구요. 술담배를 줄이거나 개인적인 취미 (TV 시청, 온라인 게임?) 시간을 줄이는 등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일도 많은 것 같습니다.

업데이트(6/27): 이 글을 쓰고 나서 4일만에 블로그에 6만 명이 다녀갔네요. 그 동안 받은 피드백을 바탕으로 후기를 써서 올렸습니다. 함께 읽어보세요.

한국 소프트웨어 기업의 미국 진출에 대하여

LA에서 2년의 MBA를 마치고 실리콘밸리에 와서 정착한 지 만 4년이 되어간다. 블로그를 쓰기 시작하면서 덕분에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지난번 ‘스토리가 중요한 이유‘에서 언급했던, ‘실리콘밸리에서 투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라는 질문도 많이 받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많이 받았던 질문이 있다.

실리콘밸리에 진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김창원씨도 전에 ‘벤처의 해외 진출 – 마르지 않는 주제‘라는 글에서 언급했듯, 해외 진출, 특히 미국 진출 계획이 없는 회사는 거의 없다. 전에 내가 한국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거대한 시장의 크기가 주는 매력도 있지만, ‘미국에서 성공했다’는 것이 큰 뉴스거리가 될 만큼 고무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예전부터 ‘다큐멘터리 성공시대’에서는 항상 뚝심과 인내로 미국 시장을 뚫어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곤 했고, 나도 그런 것을 보고 감동을 받으며 자랐다. 게다가, 미국에서 성공하면 그것을 발판 삼아 다른 시장에 진출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그동안 엔젤핵(Angelhack)테크크런치 디스럽트(TechCrunch Disrupt), 해커와 파운더(Hackers & Founders) 등 샌프란시스코와 베이 에어리어(Bay Area)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이벤트에 참여하며, 또는 중고 메트리스를 사려다가 실리콘밸리의 한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어드바이저 역할을 하기도 하며 많은 스타트업이 시작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아 왔다. 동시에, 미국 진출을 시도한 많은 한국 회사들도 관찰할 수 있었다. 어떤 회사들은 이 곳에 사무실을 차리고 직원들을 뽑았고, 어떤 회사들은 영어 웹페이지와 영어 버전을 만들어 홍보를 시작했고, 어떤 회사들은 ‘현지인’ 한 명을 뽑아 그 사람을 통해 미국 진출을 시도했다. 또 어떤 회사들은 미국 진출을 처음부터 고려했으나 몇 번의 고민 끝에 결국 중단하고 한국 시장에 주력하고 있다.

아직 시간이 더 지나야 알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아직 성공 사례는 많지 않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미국에서 장기적, 지속적 성공을 이룬 한국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많지 않다. 다만, 게임 쪽에서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둔 회사들이 있다. 엔씨소프트, 넥슨 등 1세대 3D 온라인 게임 회사들을 비롯해서 게임빌과 컴투스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작년에 GREE에 인수된 파프리카랩 역시 ‘히어로 시티(Hero city)’를 통해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 기술 기반 회사의 진출 성공 사례도 있다. 차상균 교수 실험실에서 만든 티아이시스템은 2001년에 실리콘밸리에 진출한 것을 계기로  글로벌 기업인 SAP에 매각된 후 HANA라는 인-메모리 기술을 공동 개발해 2011년 6월 출시 이후 18개월동안 $700M의 매출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웹 서비스 또는 애플리케이션으로 미국에서 의미 있는 성공을 거둔 회사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참 어렵긴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문지원씨와 함께 미국에서 Viki.com을 공동창업해서 실리콘밸리의 저명한 투자자들로부터의 투자 유치에 성공하고 세계 수천만의 유저가 사용하는 서비스를 만든 후, 지금은 서울에서 Vingle.net을 공동창업 후 운영중인 호창성씨는 2011년 말에 Bay Area K Group을 대상으로 했던 세미나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미신(myth)입니다. 즉, 한국에서 먼저 성공하는 서비스를 만들고 세계 시장에서 경쟁한다는 전략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제품(Product)의 경우엔 한 지역에서 성공한 후 다른 나라로 진출할 수 있지만 서비스(Service)의 경우 기획 단계부터 고려해야 할 것이 많으므로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충분히 공감이 되는 말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심지어 한국어 버전도 만들지 않고 처음부터 모든 것을 영어로 만들어 시작하는 회사들도 꽤 있다. 하지만 여전히, Vingle을 제외하고는 영어권 국가에서 의미 있는 성공을 거둔 회사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한편, 정부에서는 전에도 그랬듯이 ‘해외 수출’을 위해 끝없이 투자하고 있다. 게임빌에 있던 시절, ‘정부 과제’를 따내기 위해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것은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 그리고 ‘수출 가능성’이었다. 지금도 상황은 비슷한 듯하다. 박정희 시대부터 있었던 ‘수출 대국’의 사명이 지금은 소프트웨어 수출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 지원 자금을 통해 많은 벤처 기업들이 실리콘밸리 문을 두드린다. 많은 사람들이 깊은 인상을 받고 돌아가지만, 혹 의미 없이 세금이 쓰이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우려도 된다.

미국 시장에 눈독을 들이는 나라는 한국 뿐이 아니다. 중국, 인도, 이스라엘 등도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해 끝없는 도전을 한다. 숫자 자체가 많아서인지 미국에서 성공하는 사례가 한국보다는 많이 있는 듯하다. 인도 회사인 Infosys가 미국 산업계에서 차지하는 영향은 상당하다. 1999년에 미국 증시에 상장한 이후, 얼마 전에는 런던 증시에서도 거래를 시작했다. 원래 외국에 있던 회사가 진출한 사례는 아니지만, 중국인과 인도네시아인이 만든 마벨 테크놀러지(Marvell Technology)의 성공 신화도 유명하다. 현재 회사 가치가 $5.5B (약 6조원)에 이르는 이 회사는, 세핫 수타르자(Sehat Sutardja)와 그의 아내 웨일리 다이(Weili Dai), 그리고 세핫의 형제인 판타스 수타르자 (Pantas Sutardja) 세 명에 의해 1995년에 만들어졌다. 세핫 수타르자는 인도네이사 자카르타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와 버클리 박사 과정을 마쳤으며, 웨일리 다이 역시 상해 출신으로 버클리 대학에서 학부를 마쳤다. 산타클라라에 위치한 이 회사는 고속도로 237번 바로 옆에 있어 그 쪽을 지나갈 때마다 항상 보게 된다.

산타클라라에 위치한 마벨 테크놀러지(Marvell Technology) 본사
산타클라라에 위치한 마벨 테크놀러지(Marvell Technology) 본사

지금은 애플과 구글이 만들어준 생태계 덕분에 전 세계 시장으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파는 것이 쉬워지기는 했다. 앱스토어에 올리고 영어 버전을 만들기만 하면 누군가가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소프트웨어를 널리 알리고 그를 이용해 돈을 버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여전히, 한국 스타트업의 미국 진출은 어렵다. 왜 어려울까 생각을 해봤다.

첫째, 한국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게임빌의 미국 진출을 경험하며 뼈저리게 느꼈던 부분이고, 미국에 살면서 더 크게 느끼는 부분이다. 자동차와 전자 제품 등 몇 가지를 빼면, 한국에 비해 여기에서는 뭐든지 비싸다. 가장 비싼 것이 인건비이다. 다음은 민트(Mint.com)의 창업자인 애런 팻저(Aaron Patzer)가 했던 강연에서 본 것이다. 그가 초기에 서비스를 만드는데 들었던 비용을 설명한 슬라이드이다. 직원이 5~6명인 팀을 구성한 후 1년에 얼마가 들었는 지를 계산한 것인데, 연간 약 $600k (6.6억원) 정도였다. 비싼 건강 보험료에 돈이 꽤 들어가고, 1년에 5만달러나 소요된 변호사 비용도 무시해서는 안된다. 한편, 미국에서 특허 출원 및 등록을 하려면 건당 2만 달러 정도 든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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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t.com 초기 소요 비용. 팀원들 연봉으로 일인당 5만달러에서 9만달러 사이가 들었고, 사무실 및 복지 등에 연간 10만 달러, 그리고 변호사 비용이 1년에 5만 달러. 그래서 합해서 총 60만 달러가 들었다.

이건 순수하게 엔지니어 및 디자이너를 고용하기 위해서만 드는 비용이고, 홍보에 비용을 쓰겠다고 하면 즉시 큰 비용이 추가된다. 웬만한 홍보용 비디오 제작 비용이 1만 달러에 달한다. 여기에 사무실 임대 비용 등이 있다. 만약 캘리포니아에서 살겠다고 생각하면, 아파트 렌트와 생활비 등으로 최소한 월 3천달러 정도를 잡아야 한다. 방 한 개짜리 아파트 월세가 2000달러 정도 하는데, 일년이면 2만 4천달러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월세 3000달러가 쉽게 넘는다.

둘째, 친구와 가족(Friends & Family)이 적다. 물론 만들면 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고 다양성이 부족하기 쉽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이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경우 주변에 친구들이 많이 있고, 친구들이 주변에서 많이 응원해주면 큰 도움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사업을 할 때는 미국에서 오래 산 사람이 유리하다. 내 MBA 동기인 쟈니 오닐(Johnny O’neal)은 카드 게임을 만든 후 킥스타터(Kickstarter)를 통해 21만 5천달러를 모금했는데, 하루만에 12,000달러의 모금액을 채운 후 “Some of the pledges here are from friends and family members (이 중 일부는 친구와 가족으로부터 모금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이 케이스에는 예외가 많이 있다. 뒤에서 더 설명하겠다.

셋째, 사람들 입에 회자될만한 스토리를 만들어내기가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썼던 ‘스토리가 중요한 이유‘에서도 다룬 바 있다. 한국에서는 스토리를 퍼뜨려줄 수 있는 기자와 블로거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 2000년 당시 게임빌을 처음 시작했을 때 14개 신문에 소식이 나갔다. 당시 ‘서울대 벤처 동아리’ 출신들이 게임 회사를 만들었다는 것이 뉴스거리였다. 또한, 책 ‘티몬이 간다’에 따르면, 티켓몬스터 신현성 대표는 처음 티몬을 알리기 위해 ‘맥킨지 컨설턴트 출신’이라는 타이틀을 활용했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한국 신문은 화제로 삼지만, 미국에서는 공감할만한 화제거리가 되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타파스틱(Tapastic) 창업자 김창원씨의 홍보 방법은 매우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PR 회사를 쓰는 동시에 자신이 직접 ‘강남 스타일’을 빗댄 글을 하나 써서 500 Startup 페이지에 올렸다. 이 과정은 ‘실리콘밸리 언론소개 팁 공유’라는 블로그 글에 아주 잘 설명이 되어 있다.

넷째, 어색한 영어 표현들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있다. 번역 자체가 엉성하게 된 경우도 있고, 번역을 하긴 했는데 표현이 너무 ‘한국적’이라 영어로 읽으면 어색한 경우가 있다. 고객에게 바싹 다가가서 감동을 줘도 모자란 판에, 표현이 어색하면 깊은 인상을 남기기가 힘들다. 나는 카카오톡을 영어 버전으로 쓰고 있는데, 군데 군데에서 그러한 어색함이 발견된다. 이에 대해 전에 트윗을 했던 적도 있는데, 아래에 그 스크린샷이 있다. 첫 번째는, 카카오톡에서 내 연락처 접근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떴던 메시지이고, 두 번째는 친구 추천 기능을 사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친구 찾기’ 탭을 눌렀더니 떴던 메시지이다. Are you really sure?라는 강한 표현으로 시작한 것, grant access라는 기술적인 표현을 쓴 것, ‘utilize contacts list’ 에서 utilize라는 단어를 쓴 것도 어색한데, ‘disallow the transfer’라는 표현은 정말로 이상하다. 그리고 오른쪽은 아마 ‘당신은 친구 추천 기능을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를 영어로 번역한 것 같은데 ‘Do not use friends recommendation function (친구 추천 기능을 사용하지 마십시오)’라고 명령어로 엉뚱하게 번역되어 있다(지금 확인해보니 이 표현은 수정되었다). 그리고 이런 기능의 경우 ‘feature’라고 해야 자연스러운데, ‘기능’을 그대로 영어로 직역해 ‘function’이라고 한 것도 이상하다. function은 수학에서 ‘함수’를 뜻하거나, 소프트웨어에서 서브루틴을 가리킬 때 자주 쓰는 단어이다. 카카오톡 하나를 예로 들기는 했지만 이런 어색한 번역은 다양한 소프트웨어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카카오톡 영어 버전
카카오톡 영어 버전의 어색한 표현들

이는 마치 우리가 영어 웹사이트를 그대로 한글로 번역해 놓은 웹사이트를 보면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클라우드 기반 CRM 솔루션 분야에서 세계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회사인 세일즈포스닷컴의 한국어 사이트를 예로 들어보겠다. ‘소셜 마케팅 선두 어플리케이션으로 고객에게 다가가서 대화 참여’, ‘소셜 HR 업무수행관리 어플리케이션’ 등 이해하기 어려운 어색한 표현들이 한 두개가 아니다. 또, 페이지 제일 아래에는 ‘세일즈포스 3백만 기업 고객의 성공 스토리와 그 이상‘이라는 어색한 표현이 있는데, 원래 표현이 뭐였는지 찾아보니 ‘3 million success stories and counting‘ 이라는, 영어로는 매우 자연스러운 말이었다. 그보다는 ‘3백만개의 성공 사례가 있고, 지금도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라고 번역하면 조금 더 자연스러운데, 여전히 입에 ‘착 감기지는’ 않는다.

세일즈포스 코리아 한국어 페이지
세일즈포스 코리아 한국어 웹사이트. 표현들이 어색하고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제품이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를 많이 따진다. 스타벅스는 시애틀에서 시작되었고, 애플, 구글과 페이스북은 실리콘밸리에서 만들어졌다. 오래 전부터 애플 제품에서 흥미롭게 보았던 것이 하나 있는데, 모든 애플 제품은 중국에서 제조, 조립되지만, 항상 제품 뒷면에는  ‘Designed by Apple in California‘라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애플 본사를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중국, 인도 출신 엔지니어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에 깜짝 놀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제품의 상당 부분이 중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사람들은 애플을 생각할 때 캘리포니아를 떠올린다.

Designed By
아이폰 5 뒷면. Designed by Apple in California. Assembled in China라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소프트웨어 제품의 경우 이 경향이 더 명확하다. 미국에서 인기를 누리는 소프트웨어 및 서비스 대부분이 미국에서 만들어졌다. LinkedIn, Pandora Radio, Evernote, Yelp, OpenTable, Flixster, Instagram, Netflix, Shazam, Zillow 등등. 사람들이 이런 소프트웨어들이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일일이 따지면서 사용하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만든 제품에 자연스럽게 더 끌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미국 제품은 제품 이름, 로고, 유저 인터페이스 디자인 등 구석 구석에서 티가 난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만든 제품들도 그 자신만의 ‘색깔’이 있다.  그 색깔을 살려야 더 성공할 수 있는 드문 경우가 아니라면, 아무래도 미국 소비자들에게는 미국에서 만든 제품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미국 진출 실패 사례로 많이 언급되는 싸이월드(Cyworld)는 그런 면에서 너무 이질적이지 않았나 싶다. ‘싸이버 월드’를 줄인 ‘싸이월드’라는 이름이 어색하게 들리는데다,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라는 느낌이 안들고, 디자인이나 유저 인터페이스가 당시 미국에서 인기 있었던 소셜 네트워크였던 마이스페이스와 비교하면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미니미’, 또는 ‘미니미 방’을 꾸미는 일도 미국 대중에게 어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마이스페이스 vs. 싸이월드
사진과 글을 강조하는 마이스페이스(좌)와 미니홈을 강조한 싸이월드의 웹사이트 디자인(우)

반면에 미국과 북유럽, 서유럽, 그리고 호주/뉴질랜드 등은 색깔이 비슷한 면이 있어서 심리적 장벽이 조금 낮은 것 같다. 미국에서 성공한 많은 소프트웨어와 서비스들이이 유럽에서도 크게 인기를 끄는 것은 물론이고,유럽에서 만든 제품이 미국에서 성공한 사례도 많이 있다. 할 일 목록 관리 프로그램인 Things는 사실 독일에서 만들어졌다(그렇지만 홈페이지에 가 보면 꼭 미국 회사같은 느낌이 든다). 스카이프(Skype) 역시 스웨덴 출신인 니클라스 젠스트롬(Niklas Zennstrom)과 덴마크 출신인 야누스 프리스(Janus Friis)에 의해 유럽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그들은 2005년에 $2.6B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회사를 이베이(eBay)에 팔았고, 2009년에 실버 레이크 파트너스(Silver Lake Partners)라는 회사를 통해 스카이프를 이베이로부터 다시 사들였다가 2년 후에 $8.5B(9조원)이라는 엄청난 가격으로 마이크로소프트에 팔았다. 국제 전화를 쉽게 걸 수 있게 해주는 회사 Rebtel 역시 미국 시장 진출에 성공한 스웨덴 회사이다. 김창원씨가 블로그에서 ‘미국 진출시 창업자가 직접 진두지휘하는 것이 중요함’을 설명하기 위해 언급했던 또 다른 스웨덴 회사 Spotify의 사례도 있다. 특이하고 재미있게도, 이스라엘은 색깔이 분명히 다르지만 종종 미국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회사는 네비게이션 앱을 만든 웨이즈(Waze)이다. 웨이즈는 처음 이스라엘에서 시작했고, 직원들 대부분이 이스라엘에 있으며, 팔로 알토에 작은 사무실을 두고 있다. 얼마 전에 사용자 수가 1,750만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한 바이버(Viber)도 이스라엘에서 만들어졌다 (다만, CEO인 탈만 마르코(Talman Marco)는 이스라엘계 미국인이다).

웨이즈(Waze)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성공을 거둔 이스라엘의 네비게이션 앱, 웨이즈(Waze)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서비스가 아닌 물건의 경우엔 위에서 언급한 것과 상황이 많이 다르다. 내 아이폰에 장착된 링케(Ringke)라는 아이폰 케이스는 리어스(Rearth)라는 한국 회사에서 제조했는데, 아마존에서 ‘iPhone 5 case’라고 검색하면 1등으로 뜰 정도로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나도 몇 달간 사용하고 있는데 적극적으로 주변에 추천할 만큼 품질이 좋다.

미국 사람들이 국산을 회피하는 자동차 시장도 마찬가지이다. 일본, 독일차가 시장을 장악한 지 이미 오래이고, 최근에는 한국 차들이 선전하고 있다. 얼마 전 수퍼볼 광고를 보다가 크라이슬러 자동차의 광고 마지막이 “Imported From Detroit (디트로이트에서 수입되었음)“로 끝나는 것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미국 사람들이 오죽 수입차를 선호하면 ‘디트로이트’에서 수입했다는 것이 광고 카피일까.

Imported from Detroit, Chrysler.
크라이슬러 광고 카피, “Imported from Detroit”

지금까지 손에 만져지는 제품과 달리 서비스와 소프트웨어의 경우 미국 시장 진출이 쉽지 않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렇지만 성공 사례는 분명히 있고 계속해서 도전할 가치가 있다.

‘미국 시장 진출에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경험에 비추어 먼저 이야기를 해보면, CEO의 의지, 뛰어난 인재는 물론이고, 무엇보다 시간과 끈기가 필요하다. 게임빌이 해외 시장 개척에 관심을 가지고 노력한 건 2000년 창업때부터였다. 2002년에는 게임쇼에 게임을 가져가서 유럽의 퍼블리셔와 계약을 하기도 했고, 2003년, 2004년에는 중국, 일본, 미국 회사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게임을 공급했다. 게임빌이 게임 개발을 맡고 현지 퍼블리셔가 테스트, 홍보, 이통사 계약 등을 담당하는 형식이다. 가장 처음 미국에서 의미있는 결과를 내었던 것이 야구 게임이었다. CBS Sportsline이라는 회사와 라이센스 계약을 맺고 미국에 수출했는데, 억단위 매출이 나왔던 것이다. 원래 우리가 가진 게임은 2002 프로야구라고, 일본의 야구 게임을 본따 이등신 캐릭터를 써서 만들었던 것인데, 미국에서는 ‘실사 이미지’가 더 잘 먹힐 것이라는 판단 하에 선수 이미지를 모두 8등신 형태로 바꾸느라 좀 고생을 했다.

게임빌 2002 프로야구(좌)와, 디자인을 바꿔 만든 CBS SportsLine Baseball (우)

이 게임이 어느 정도 성공한 후 다음 시리즈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2등신 캐릭터를 그대로 써보기로 했다. 우리 게임의 컨셉과 디자인을 그대로 살린 것이 미국시장에서 먹힐 지 실험해보자는 취지였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출시 각종 게임 잡지의 리뷰를 살펴보았는데 다들 2등신 캐릭터가 재미있다며 좋아했다. 그 이후로 게임빌 야구는 한국에서는 20xx 프로야구, 해외에서는 Baseball Superstars라는 이름으로 동일한 디자인과 컨셉으로 출시되고 있으며, 게임빌의 해외 매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게임은 좀 독특한 것 같다. 좀 이질적으로 느껴지더라도 게임이 재미있으면 문화와 국경의 장벽을 상대적으로 쉽게 넘는 것 같다. 특히 액션이나 스포츠 게임처럼 스토리가 게임의 핵심을 차지하지 않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아이폰과 안드로이드 마켓 모두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게임빌의 야구 게임, Baseball Superstars
전 세계 아이폰과 안드로이드 마켓 모두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게임빌의 야구 게임, Baseball Superstars

이렇게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2006년부터는 토렌스에 미국 지사를 설립해서 이통사와의 직접 계약을 통한 게임 공급을 시도했다. 처음 한동안 미국 지사에 적자가 누적되었다. 흑자로 전환되기까지 수년이 걸렸고, 그 기간을 버티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중간 중간 ‘과연 우리가 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의견들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게임빌이 오늘날의 성공을 볼 수 있게 된 데에는 현재 게임빌의 미국 법인인 ‘Gamevil USA’를 담당하는 이규창 지사장(Kyu Lee)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는 내가 아주 존경하는 사람이다. 미국에서 6년의 어린 시절을 보낸 덕에 영어는 잘했지만 미국에 친구나 인맥이 많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게임 업계에는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쉽게 할 수 없었던 일을 그는 ‘인내와 끈기’로 해냈다. 미국의 파트너들에게 항상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뚝심을 가지고 조용히 쌓아올렸다. 그러자 미국에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던 ‘Gamevil’이라는 이름이 언론을 통해 조금씩 소개되기 시작했으며,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팬들이 생겨났다 (현재 게임빌 페이스북 팬페이지의 ‘Like’ 수는 35만 8천에 달한다). 그 결과, 2012년에는 총 매출 702억원 중 270억원이 해외에서 발생했으며, 이는 전체 매출의 무려 39%에 해당한다. 현재 모습만 보면 하루 아침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려 10년의 ‘끈기’가 담긴 결과물이다.

미국 법인을 따로 설립해서 기술만 옮기는 것도 한 방법이다. 다날이 이 방법을 채택했다. 휴대폰 결재 사업 모델로 미국에 진출할 때, 직접 사람을 파견해 미국 사업을 하는 대신 폴 김(Paul Kim)이라는 사람을 찾았다. 그는 Tuck Business School을 졸업하고 삼성 벤처 캐피털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다날의 기술을 가져와 BillToMobile이라는 미국 회사를 따로 설립한 후 독자적으로 $9.5 million (약 100억원)의 벤처캐피털 투자를 유치했다. 약 3년 후, 이 회사는 미국 4대 이통사(AT&T, 버라이즌, 스프린트, T-Mobile)와 계약을 모두 끝냈고, 나중에 모회사인 다날이 이 회사 지분을 인수하며 미국 시장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2013년 1월에는 U.S. 셀룰러(U.S. Cellular)와도 계약을 체결하면서 미국 전체 휴대폰 사용자의 90%를 커버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미국 법인을 세워 진출하기보다는 파트너 회사를 통해 먼저 서비스를 해 보거나 고객을 확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게임빌 미국 지사를 세우기 전에 퍼블리셔와 일하면서 참 좋은 경험을 많이 했다. 샌디에고에 위치한 엠포마(Mforma)와 일하면서 미국에서 제품을 출시하기 위해 필요한 완성도가 어느 정도인지, 어떤 과정을 통해 제품 테스트를 하는지를 알 수 있었고, 디즈니(Disney)와 함께 일하면서 ‘현지화(localization)’의 중요성, 그리고 현지화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 등을 체험할 수 있었다. 비록 파트너 회사와 일하기 위해 수익을 분배해야 했고 대가를 지불해야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과정에서 배운 것들 덕분에 후에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게임의 경우 현지화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들이 많이 있지만, 기업용 솔루션이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소프트웨어의 경우 딱 맞는 파트너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노력하면 분명히 서로에게 도움 될 수 있는 파트너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동안 많은 분들에게 대답했던 내용을 하나로 정리하려다보니 글이 길어졌다. 미국 진출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참고로, ‘미국에서 창업하기‘는 다른 차원의 주제이므로 이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스토리가 중요한 이유

전에 피터 구버의 ‘Tell to Win‘이라는 책을 읽은 후에 간략하게 블로그에 내용을 정리해서 올린 적이 있는데, 그 책을 읽고난 후 스토리가 가진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럴수록 스토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게 된다.

1. 투자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스토리

실리콘밸리에서 투자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참 많은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이 곳의 투자자들이 지금까지 어떤 사람들에게 왜 투자를 했는지 들어보면 거기에 답이 있다. 그런 생각을 가장 잘 정리해서 공유하고 있는, 내가 좋아하는 두 개의 블로그는 LA의 투자자 마크 서스터Both sides of the table과 실리콘밸리의 투자자 벤 호로위츠(Ben Horowitz)개인 블로그이다. 실리콘밸리의 가장 크고 명성이 높은 벤처캐피털 중 하나인 안드리센 호로위츠(Andreesseen Horowitz)의 공동창업자이자, 글을 가장 잘 쓰는 벤처캐피털리스트 중 한명인 벤 호로위츠는, 무려 1,000만명이 읽고 있다는 그의 블로그에 자기가 왜 Christian이라는 사업가에게 사업 모델에 대해서 듣기도 전에 투자를 결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A few months ago, Aneel Bhusri offered to introduce me to one his favorite entrepreneurs. Since Aneel is, for my money, the best enterprise venture capitalist in the world, I immediately agreed and Aneel did not disappoint. He introduced me to Christian Gheorghe, founder of TIAN Software, a predictive analytics company acquired by OutlookSoft, where, as Chief Technology Officer, he introduced important and innovative Enterprise Performance Management applications into the market. OutlookSoft was eventually acquired by SAP. (몇달 전, 아닐 부스리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창업가 한 명을 만나보라고 제안했다. 나는 즉시 수락했고, 아닐은 실망시키지 않았다. 크리스천 게오르그라는 TIAN Software 창업자였는데, 회사를 OutlookSoft에 매각한 후 CTO로서 혁신적인 소프트웨어를 만들었으며, OutlookSoft는 최종적으로 SAP에 매수되었다.)

Christian grew up under a totalitarian communist government in Romania during the 1970s and 80s. He first journeyed to the US in 1989 when he arrived knowing no English, almost nothing about capitalism, and with $27 in total assets. He began his new life working in construction before moving into the more lucrative limousine driving business. Through these efforts he was able to generate enough money to put himself through school, learn English and re-enter the workforce using his original field of study, computer science. Eventually, he founded his own company and completed the remarkable journey from Communism to Entrepreneur in one lifetime. (크리스천은 완전한 공산주의였던 루마니아에서 자랐다. 그가 1989년에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으며,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몰랐고, 주머니엔 27달러밖에 없었다. 공사장에서 일을 시작한 후에 리무진 운전 기사가 되었다. 그 돈으로 학교를 다니고, 영어를 배운 후에 컴퓨터 공학을 공부했다. 결국 자신의 회사를 만들었고, 하나의 인생에서 공산주의에서 창업가로서의 놀라운 여행을 마무리지었다.) After hearing Christian’s background, and prior to hearing anything about his new company, I was ready to co-fund him with Aneel. (크리스천의 백그라운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자, 그의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해 듣기도 전에, 나는 이미 그에게 투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크리스천이 벤에게 가져온 것은 무엇이었는가? 스토리였다. 다른 사람이 감탄하면서 듣게 만드는 그의 인생 스토리이다. 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크리스천이 만든 그 회사의 이름은 Tidemark이며, 그 이후 추가 펀딩에 성공하며 잘 성장하고 있다.

2. CEO가 가져야 할 중요한 자질, 스토리텔링

벤은 또한 그의 회사가 어떻게 투자를 받기 위해 찾아온 CEO들을 평가하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썼다. 그 중 한 단락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The CEO must set the context that every employee operates within. This context gives meaning to the specific work that people do, aligns interests, enables decision-making and provides motivation.Well-structured goals and objectives contribute to the context, but they do not provide the whole story. More to the point, goals and objectives are not the story.  The story of the company goes beyond quarterly or annual goals and gets to the hardcore question of whyWhy should I join this company? Why should I be excited to work here? Why should I buy your product? Why should I invest in the company? Why is the world better off as a result of this company’s existence? (CEO가 정해놓은 컨텍스트 안에서 직원들이 움직인다. 이 컨텍스트는 사람들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관심을 하나로 맞추며, 의사 결정을 이끌어내고, 동기 부여를 제공한다. 잘 정리된 목표와 목적이 있으면 도움이 되지만, 그것들이 스토리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꼬집어 이야기하면, 목표와 목적은 스토리가 아니다. 회사의 스토리는 분기, 또는 연간 목표를 넘어 “왜?”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만든다. 이 회사에 합류해야 하는가? 여기서 일하면 재미있을까? 당신의 제품을 사야 하는가? 내가 당신의 회사에 투자해야 하는가? 이 회사가 존재함으로서 세상이 더 나아지는가?) A company without a story is a usually a company without a strategy. (스토리가 없는 회사는 대개 전략이 없는 회사이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스토리가 없는 회사는 전략이 없는 회사이다. 처음에 아무리 창업자가 비전과 큰 목표를 가지고 시작했다 하더라도 비전이나 목표는 너무 장대해서 현실감이 떨어질 수 있고, 회사의 성장과 함께 계속 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왜” 이 회사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스토리는 변하지 않는다. 스토리는 살아서 직원들에게, 투자자들에게, 그리고 고객들에게 계속 퍼져나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사람들의 머리 속에 ‘강하게’ 기억된다.

3. 고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스토리

Fact tells, but story sells라는 말이 있다. 한글로 뭐라고 번역해야 할 지 조금 애매한데, ‘사실’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그칠 뿐이지만 ‘스토리’는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 한다는 뜻이다. 다니엘 레비스라는 한 마케팅 컨설턴트가 쓴 글, “11 Reasons Why Facts Tell and Stories Sell“을 읽어보면 더 공감이 된다. 스토리가 왜 강력한 무기인지, 왜 스토리가 사람들의 경계심을 허물고 구매 결정을 쉽게 하도록 도와주는지 11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하나만 인용해 보겠다.

The natural condition of your potential buyer is “guard up”, mind closed — afraid of having to think something new… of being taken advantage of… of looking foolish in front of others for making a bad purchase. They’re fighting you all the way. But when you sell with story there is little to resist against. You are not telling people what to think. You are simply showing them what happened in a similar situation to their own, and leaving it up to them to draw their own conclusions. (구매자들은 평소에 방어 준비를 하고 마음을 닫은 채로 있다. 그들은 새로운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하거나, 바가지를 쓰거나, 잘못된 구매 결정을 내려 사람들 앞에서 바보가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당신의 물건을 사지 않겠다고 싸우고 있다. 그러나, 스토리를 전달하면 저항이 훨씬 줄어든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생각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단순히 그들이 처한 상황과 비슷한 조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를 보여준 후, 그들이 직접 결정을 내리도록 만든다.)

Purple Cow (보랏빛 소가 온다)의 저자로 유명한 미국의 사업가 세스 고딘은 그의 블로그에서 “위대한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방법 (How to tell a great story)“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깨달음을 주는 좋은 글이니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마찬가지로 한 꼭지를 인용해보겠다.

Most of all, great stories agree with our world view. The best stories don’t teach people anything new. Instead, the best stories agree with what the audience already believes and makes the members of the audience feel smart and secure when reminded how right they were in the first place. (무엇보다도, 위대한 스토리는 우리의 세계관과 일치한다. 최고의 스토리는 사람들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최고의 스토리는 청중들이 이미 믿고 있는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그들이 똑똑하다고 느끼게 하며, 그들이 처음부터 옳았다는 것을 각인시켜줌으로써 안전하다고 느끼게 한다.)

The Storytelling Animal (이야기하는 동물)의 저자 조나단 고트쉘 (Jonathan Gottshall)은 “Why Storytelling is the Ultimate Weapon(왜 스토리텔링이 궁극적인 무기인가)“라는 짧은 글에서, 사람들이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나 스프레드시트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며, 다른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Once upon a time..(옛날 옛적에..)”으로 스토리를 시작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4. Frame of Reference (기준 좌표계)

다시 ‘실리콘밸리에서 투자받기’로 돌아가 보자. 투자자들은 물론 매출이 얼마나 나왔는지, 한국에서 얼마나 많은 고객들이 쓰는 제품인지, 얼마나 기술력이 좋은지에 관심이 많지만, 그들의 마음이 궁극적으로 ‘스토리’에 의해 움직인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에게 어떤 스토리로 접근해야 할 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여야한다는 것이다. 물리학에서 ‘Frame of Reference(기준 좌표계)’라는 용어가 있다. 두 물체의 상대적인 거리나 속도를 계산할 때 기준 좌표계를 정하고 두 물체를 같은 좌표계에 놓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뭐든 계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Frame of Reference (기준 좌표계). 두 물체를 먼저 같은 좌표계 위에 올려놓아야 계산이 가능하다. (출처: ScienceDirect.com)

기준 좌표계가 다르면 공감을 하기 힘들다. 미국에서 자라 미국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한국 환경, 한국 고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냥 멀게만 느껴질 뿐이다. 물론 한국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기술이 많이 발전한 나라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여전히 ‘바다 건너 이야기’일 뿐이다. 창업자가 한국의 명문대를 졸업했다고 해도 ‘똑똑한가보다’ 하는 정도이지, 하버드나 MIT, 스탠포드를 졸업했다고 했을 때 머리 속에 연상될만한 그런 이미지는 없다.

2010년에 찰스 리버 벤처스, 리드 호프만, 그레이록 파트너스, 마크 안드리센, 조이 이토 등 미국의 올스타 벤처 캐피털및 투자자들로부터 500만 달러의 Series A 투자를 받았고, 현재에는 페이스북에서 무려 470만명의 팬을 가진 서비스인 Viki.com을 창업한 호창성, 문지원 대표. 그들이 이런 투자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CEO의 영입, 가파른 유저 증가 추세, 그리고 라이센스 계약의 성공 등도 있지만, 그 뒤에는 미국의 투자자들이 공감할 수 있을만한 그러한 스토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호창성씨는 스탠포드대 MBA를 졸업했고, 문지원씨는 하버드대 교육학 석사를 전공했다. 문지원씨가 하버드대학에 있을 때 아이디어를 생각해냈고, 호창성씨는 MBA과정 중에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 아이디어를 많은 사람들에게 피치하며 다듬었고, 그 과정 중에 미국 유명 VC로부터 엔젤 투자를 받았다. 그래서 테크 크런치에 나온 기사를 보면 “하버드에서 시작되었고, 싱가폴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팔로 알토에 사무실을 둔 회사”라고 인용한다. 어찌 보면 이 자체도 하나의 스토리이다.

5. 샤크 탱크, 그리고 스토리의 힘

내가 가장 좋아하는 TV 쇼 중의 하나로 블로그에서 지난번에 소개했던 샤크 탱크를 보다 보면 스토리가 가진 힘의 진수를 알 수 있다. 수많은 창업가들이 다섯 명의 백만장자 앞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투자를 요청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투자자를 움직이는 것은 제품의 우수성이나 매출 규모가 아닌 스토리이다. 창업가들은 왜, 무엇이 불편해서 그런 아이템을 만들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그동안의 과정을 설명한다. 스토리의 설득력에 따라서 투자하려다가 그만두기도 하고, 투자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마음을 바꾸기도 한다. 투자자들이 투자 결정을 내리기 전에 아주 자주 쓰는 말이 “I like you, and I loved your story (당신이 맘에 들어요, 그리고 그 스토리가 정말 좋았어요.)”이다.

어제 보았던 에피소드(Season 4, Episode 6)에서도 이런 장면이 나왔다. 단백질 에너지 드링크를 만든 뉴저지 출신의 한 여성이, 수퍼볼 챔피언이었으며, 샌프란시스코 49er 소속의 미식 축구 선수인 브랜든 제이콥스(Brandon Jacobs)와 함께 등장했다. 그녀는 자신의 에너지 드링크가 왜 마시기 편리한지, 얼마나 유일한 제품인지, 얼마나 많은 상점을 통해 배급되고 있는지에 대해 한참 이야기했고, 가만히 옆에서 듣고 있던 브랜든은 샤크 중 한 명이 “이 제품을 선수들에게 주니 좋아하던가요?”라고 묻자 비로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샤크탱크 쇼에서 투자자들에게 에너지 드링크 제품 대한 투자를 요청하기 위해 나온 브랜든과 타냐.

“저는 샌프란시스코 49er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프타임 중에 락커룸에서 사람들에게 이 드링크를 주니 다들 좋아했어요. 그것 때문에 두 번째 경기가 더 잘풀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들 기분 좋아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 샤크들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회의적이던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돌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Fubu의 창업자 데이몬드는 “난 그 이야기를 믿어요. 맘에 듭니다.”라고 이야기한다. 투자자들의 한 명인 바바라 코코란(Barbara Corcoran)은 투자를 거절하겠다며 다음과 같이 따끔하게 충고했다.

타냐, 당신은 상품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는 것을 실패했어요. 제품 포장도 좀 헷갈리구요. 그리고 브랜든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해야겠어요. 당신은 브랜든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어요. 처음으로 그의 말이 흥미로워진 순간은 그가 락커룸 이야기를 할 때였어요. 앞으로 누군가에게 피치할 때는 브랜든이 시작하게 하세요. “제가 락커룸에 있을 때였습니다…” 이렇게요.

스토리가 개인화되어야 하고 설득력이 있어야 하며, 마케팅 피치를 할 때는 스토리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6. 스토리텔링, 한국과 미국

가만히 보면 미국 회사들은, 그리고 미국 사람들은 스토리 전달에 유난히 신경을 많이 쓴다. 이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대표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바이오그래피(biography)”이다. 줄여서 ‘바이오’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 누군가를 소개할 때 한국에서는 학력과 약력만을 강조하는 반면, 미국에서는 반드시 ‘스토리’가 포함된 ‘바이오’를 강조한다. 이 ‘바이오’에는 어느 학교를 졸업했고 어느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정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업적을 이루었는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와, 때로는 어디에 사는지, 취미가 무엇인지 등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바이오가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이오를 가지고 있으며 계속해서 가다듬는다. 나 역시 자주 사용하는 바이오를 만들어서 가지고 있으며, 종종 업데이트를 한다. 이것을 읽으면 그 사람에 대해 상상을 할 수 있다.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 무슨 역할을 맡고 있는지의 정보만으로는 이미지를 상상하기 힘들다.

트위터 공동창업자 잭 도시(Jack Dorsey)의 바이오(bio). 학력이나 경력 대신 그의 스토리가 담겨 있다. (출처: CrunchBase.com)

한국와 미국의 이러한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중 또 하나는 회사 소개 페이지이다. 나는 어떤 회사의 웹사이트를 방문하면 반드시 “Management(경영진)” 페이지를 살펴본다. 어떤 경력을 가진 사람이 회사를 만들었고, 어떤 사람들이 경영진의 주요 멤버인지를 보면 그 회사에 대해 대충 감을 잡을 수 있다. 한편, 한국 회사 중에서 경영진들을 잘 소개하는 페이지를 거의 본 적이 없다. 보통 ‘회사 소개’ 페이지에 가 보면, ‘CEO 인사말’이라고 해서, 식상하고 진부한 인사말을 집어넣고 ‘조직도’라는 페이지를 넣어두는데, 나는 사실 그런 것보다는 경영진들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특히, 회사의 성장에 따라 계속 바뀌게 되는 조직도는 굳이 회사 소개에 넣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조직도가 전달하는 ‘스토리’는 아주 미미하기 때문이다. 아래는 한국의 한 중소기업의 회사 소개 페이지에서 발견한 것이다. 경영진의 이름 말고는 그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해왔고, 현재 어떤 일을 담당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고, 한편 아래와 같이 조직도가 소개되어 있다. 이 조직도를 통해 전달하려는 정보가 무엇인가? CEO만 녹색으로 되어 있는데, CEO가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라고 강조하고 싶은 것일까? 조직도를 봐서는 나머지는 꼭 CEO를 위해 존재하는 부속품인 것처럼 보인다. 한편, 번호가 붙은 개발팀이 9개나 있는데, 그것도 왜 다른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정보인지 잘 모르겠다.

한 한국 중소 기업의 회사 소개 페이지 중 일부. 이러한 조직도는 스토리를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별로 필요가 없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각 본부의 장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자세히 소개하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다.

반면, 미국의 회사들을 보면 항상 경영진 소개 페이지가 따로 있고, 이 페이지에 상당히 정성을 들인다. 이것은 배울 점이라고 생각한다. 구글의 경영진 소개 페이지가 좋은 예이다. 아래는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중소 기업’인 Climate.com의 Leadership 페이지인데, CEO를 비롯해서 회사의 경영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한 명씩 아주 자세히 소개해 놓았다.

샌프란시스코의 중견 기업인 Climate.com의 소개 페이지. 경영진을 한 명 한 명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한국 vs 미국 이야기로 잠깐 샜는데, 결국 강조하고 싶은 것은 ‘스토리’를 전달하려는 노력이 개인 뿐 아니라 회사 차원에서도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미국의 투자자들과 소비자들이 스토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 경우를 보아도 그렇다. 자전거로 운동할 때 그 경로를 기록해주는 GPS 트래킹 앱을 예로 들어보자. 아이폰 앱스토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앱은 10개도 넘는다. 그 중 내가 쓰는 앱은 Strava이다. 왜 내가 이 앱을 쓰는가? 친구의 추천을 받기도 했고, 써보니까 인터페이스가 깔끔하고 속도가 빨라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이 앱을 만든 사람들의 스토리가 좋았기 때문이다. 홈페이지에서 ‘About‘을 클릭하면 아래와 같은 말로 시작한다.

Strava grew out of our own needs as athletes. With busy lives requiring much solo training, we missed the sense of camaraderie and friendly competition that drove us to achieve our best through training with others. We envisioned Strava as the means to put our workouts and races into context. We call that social fitness. (스트라바는 운동을 좋아하는 우리 자신의 필요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운동을 혼자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과의 우호적 경쟁을 할 때만큼 최선을 다해서 운동하게 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운동하는 정보를 다른 사람들의 정보 속에 놓아 비교가 가능하도록 Strava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셜 피트니스’라고 부릅니다.)

그 아래에는 Strava를 만드는 사람들의 사진을 올려두었다. 마우스를 올리면 그들의 이름과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가 나온다. 이렇게 함으로써, Strava는 아웃도어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회사가 전하고 싶어하는 스토리이다. 이런 것을 보면 제품에 대해 신뢰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확보된 신뢰는 웬만해서는 잘 사라지지 않는다.

Strava의 About 페이지에 등장하는 팀 소개

7. 가장 강력한 스토리에 대하여

제품을 홍보하는 스토리 중 가장 강력한 것은 본인의 스토리이다. ‘왜’ 만들기로 결심했는지를 보여주는 스토리. 미국에서 성공한 많은 서비스들은 이러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Netflix는 블락버스터에서 비디오를 빌렸다가 연체료를 잔뜩 물고 나서 짜증이 나서 만들어진 회사고, AirBnb는 창업자 둘이 컨퍼런스에 참석했다가 방을 구하기가 힘들어 만든 회사이다.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스토리는 유투브를 창업한 계기이다. 이 스토리는 인터뷰, 책, 뉴스 기사 등을 통해 끝없이 반복되었고, 그 강력한 한 줄의 스토리는 투자자, 직원, 그리고 고객들을 사로잡았다. 아래는 위키피디아의 Youtube 페이지의 두 번째 문단이다.

According to a story that has often been repeated in the media, Hurley and Chen developed the idea for YouTube during the early months of 2005, after they had experienced difficulty sharing videos that had been shot at a dinner party at Chen’s apartment in San Francisco. Karim did not attend the party and denied that it had occurred, while Chen commented that the idea that YouTube was founded after a dinner party “was probably very strengthened by marketing ideas around creating a story that was very digestible”. (미디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스토리에 따르면, 헐리와 체드는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첸의 집에서 저녁 파티를 하며 비디오를 찍었는데, 그것을 공유하기가 어려워서 2005년 초에 유투브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유투브의 또 다른 공동창업자 카림(Karim)은 그 파티에 참가하지 않았고, 그런 일도 없었다고 부인했다. 이 스토리가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사람들이 그 스토리를 바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2005년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런 불편한 경험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많은 한국 회사들이 미국에 진출하지만 대부분 투자자들이나 소비자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실패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되고, 사람들이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또다시 전달할 수 있는 스토리가 부족해서가 아닐까 한다.

8. 마지막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다. 후배들에게 가끔 “선배님이 제 나이로 돌아간다면 무슨 일을 하시겠어요?”라는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사실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난감한 질문인데, 내가 종종 하는 조언은 “무엇이 되었든,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일을 해보라”는 것이다. ‘Start A Real Movement’, 즉 삶(SARM)이라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기 위해 미국과 캐나다의 명망 있는 사회적 기업들을 탐방하며 탐방기를 블로그에 올리고 있는 백운용씨. 지난 6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메릴린치에서 일하고 있었고, 사회적 기업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세계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위와 같은 질문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 때 했던 말은 ‘스토리는 자기만의 색깔이며, 자신에게만 남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큰 가치를 가질 것이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그는 회사를 그만 두고 SARM을 시작했으며, 오직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강력한 스토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 강력한 스토리는 계속해서 퍼져나갈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것이고,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브랜드를 만들어줄 것이다.

내가 감명깊게 읽었던 피터 구버의 책, “Tell to Win”에서 나온 단락 하나를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The Trojan Horse was a delivery vehicle in disguise. So, too, are purposeful stories. They cleverly contain information, ideas, emotional prompts, and value propositions that the teller wants to sneak inside the listener’s heart and mind. Thanks to their magical construction and appeal, stories emotionally transport the audience so they don’t even realize they’re receiving a hidden message. They only know after the story is told that they’ve heard and felt the teller’s call to action. (트로이 목마가 군사를 숨기기 위해 변장을 하고 배달되었던 것처럼, 목적이 있는 스토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스토리는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의 머리와 마음에 심어주고 싶어하는 정보, 아이디어, 감정적 촉발, 상품 핵심 가치 등을 교묘하게 숨기고 있다. 스토리가 가진 마법적인 힘 덕분에, 청중들은 숨겨진 메시지를 듣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한다. 스토리를 모두 듣고 나서, 말하는 사람이 뭔가 액션을 취하도록 유도하면 그제서야 그 사실을 깨닫는다.)

당신은, 그리고 당신의 회사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가?

고시 제도 단상(斷想)

최근 몇 달동안 한국에서 온 후배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학교 생활 중에 시간을 내어, 또는 회사 휴가를 내고 실리콘밸리에 온 만큼 창업에 관심이 많았고, 익숙하던 환경에서 떠나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고 싶어하는 후배들이었다.

주변의 친구나 후배들이 고시에 너무 몰입해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 고시가 참 유행이었다. 서울대 중앙도서관 5층 열람실, 6층 열람실을 줄여 “중도 5열”, “중도 6열”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들어가면 후끈한 기운과 함께 ‘고시 냄새’가 나곤 했다. 서울대 도서관 중 외부인에게 공개된 곳이기 때문에 더한 것도 있겠지만, 그 중 90%쯤은 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도 한 때 고시 공부를 하느라 거기에 앉아 있었다. 아침 8시에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두꺼운 헌법, 민법 책을 펼쳐들고 공부하다가 점심에는 학생 회관에 걸어가서 1200원짜리 밥을 사 먹고, 고시 공부하는 다른 형들과 함께 ‘팩차기’를 30분동안 한 후 다시 도서관에 들어오고, 저녁에는 1800원짜리 밥을 사먹고 다시 도서관에 들어와서 공부를 더 하다가 11시에 집에 가곤 했다. 6개월이 채 안가 결국 시험도 보지 않고 그만두긴 했지만, 그래도 잠깐의 공부 덕분에 ‘채권자취소권’, ‘가액 반환’, ‘사해 행위’, ‘근저당권설정계약’, ‘분묘기지권’, ‘대물변제’ 등 희안한 법률 용어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는 했다. (쉬운 말로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법을 쓰면 좋은데 굳이 왜 일상생활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 옛날 말로, 그것도 문장을 끊지 않고 길게 이어 이해하기 어렵게 법률을 작성해 놓았는지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반면, 미국 헌법을 보면 표현이 조금 까다롭기는 하지만,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써놓았다.)

행정고시 사랑 카페에 가보면 무려 14만명이 가입해 있다. 한편, 신림동 고시촌에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현재는 로스쿨 등의 도입으로 예전과는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래도 고시 열풍은 여전히 남아 있는 듯하다. 일부는 성공적으로 ‘졸업’해서 고시촌을 빠져나가지만, 다른 일부는 그 곳에서 수년, 심지어는 10년 이상의 시간을 보낸다. 그 중에는 내가 잘 아는 사람도 있었다.

2008년, 2009년 당시의 고시촌의 모습을 묘사한 몇 개의 글을 찾았다. 50회 사법 시험을 합격하고 현재는 법무법인 화평에서 일하고 있는 한 변호사의 블로그에서 발견한 글들이다.

다음은 ‘고시촌 장수생의 비애’에서 인용한 것이다. 나도 고시 공부를 오랫동안 했던 사람을 만난 적이 있기에, 이 표현히 참 공감이 된다.

어느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말야.내가 거의 3일정도를 아무말도 안하고 지난거 같더라.정말 다시한번 생각보니까 맞는거야.하기야 뭐 하루종일 고시원에 처박혀 있으니까 정말 말없이 지내게 되는거야 밥먹으로 식당에 갈때도 혼자 식권내고 그냥 먹으면 되고.또 고시원에 와서 책보고 그렇게 계속 반복되는 거야……꼭 무인도에 같혀 버린 로빈슨 크루스가 되어버린거 같은거야……이러다 정말 몇개월만 지나면 우리나라 말을 잊어버릴꺼 같더라고….가끔가다 정말 단어가 머리속에서는 맴도는데 생각이 안나는거야…참 환장하겠다…..;; 그래서 요즘은 가끔 벽보면서 혼자 대화해 우리말 안까먹으려고……..어떤놈이 보면 고시공부오래 해서 미쳤다고 하겠지….하하……….

이러한 고시촌의 모습, 미국에서는 참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다. 소위 ‘고시 학원’ 같은 것도 없다. 미국에서는 판사가 되려면 로스쿨에 가면 되고, 회계사가 되려면 대학교에서 회계학을 전공하면 된다. 국가 공무원이 되려면 하버드, 프린스턴 등 명문대를 졸업하거나 로스쿨을 졸업한 후 들어가면 된다. 물론 BAR Exam 등 최종 자격을 얻기 위한 시험이 있기는 하지만 고시와 같이 몇 년이 걸리는 형태는 아니다. 유럽 등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고시 제도는 한국과 일본에 특수하게 자리잡은 형태인 것 같다. 조선시대에 문과 선비를 뽑는 ‘급제’ 제도에서 유래된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왜 대학생들 사이에서 고시가 인기일까? 후배들과 이야기하며 생각을 해 봤다.

첫째, 고등학교 시절의 성공 여부는 오직 ‘내신 성적’과 ‘수능 점수’, 즉 ‘공부’라는 잣대를 통해서만 결정되고, 많은 고등학생들은 공부를 통해 경쟁하는 것이 가장 익숙한 채로 대학에 들어가게 된다. 대학교는 또 다른 경쟁의 터전이다. 그러면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공부’를 통해 경쟁에서 이기는 길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가장 익숙하고 자신있는 길이니까. 그리고 공부라는 경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니까.

둘째, 위에서와 비슷한 이야기인데, 원하는 대학에 성공적으로 들어간 학생들은 고등학교 3년 동안 오로지 ‘공부’에만 몰입한 나머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수가 없다. 너무 당연한 것이, 그런 고민을 하는 순간 ‘내가 왜 이 공부를 해야 하나’하는 회의감을 갖게 되고, 그런 회의감이 생기면 수능 시험을 잘 볼 수가 없다. 난, 고등학교 때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일부러 생각을 안했다. 공부에 방해만 되니까. 일단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고민해도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셋째,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또 복병이 있다. 남자라면 피해갈 수 없는 ‘군대‘이다. 사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책상에 앉아 생각한다고 찾아지지는 않는다. 뭔가 ‘해봐야’ 자신의 성격에 맞는지, 그리고 잘 할 수 있는 일인지 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시도해 볼’시간도 없이 유럽 배낭 여행 갔다 오고 나서 군대에 갔다 오고 나면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다. 그리고 나서 많은 남자들이 택하게 되는 길은 ‘고시’이다. 언론 고시, 행정 고시, 사법 고시, 의사 고시,..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선택이고 길일 수 있다. 사법 고시에 합격해서 판사로 일하는 너무나 훌륭한 고등학교 친구와 후배들이 있고, 고급 공무원, 회계사로 멋지게 일하고 있는 선배, 후배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고시에 대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인위적 제한으로 인한 인위적 매력”

온갖 고시와 자격증은 결국 이미 그러한 자격을 취득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제한의 결과이다. 소위 ‘수요’와 ‘공급’의 경제 원리에 의해 수가 정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제한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 관문을 최대한 어렵게 만들고 싶어한다.

흰색 티셔츠를 200개 인쇄하고, 파란색 티셔츠를 하나 인쇄한 후 ‘한정 판매’라고 붙인 후에 이 티셔츠를 경매에 붙이니, 파란색 티셔츠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상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원래 뭔가 ‘한정’해두면 가치가 높아 보이는 법이다. 고시는 그런 한정 판매가 아닐까?

다행하게도, 고시 제도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2017년까지 사법고시가 사라질 예정이고, 2014년까지 외무고시가 사라진다고 한다. 또한 ‘민간경력자’들이 5급 공무원으로 채용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인위적인 제한도 점차 풀리고 있다.

판사로 일하고 있는 한 친구가 그랬다. 자신의 직업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항상 자기 앞에서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라고. 민사 문제든 형사 문제든 항상 복잡한 이해 관계가 얽혀 있기 마련이다. 범죄를 저질러서 잡혀 온 사람 중 자신의 죄를 바로 자백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한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작아보이게 하거나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성격이 악하거나, 거짓말이 나쁘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자기 보호’를 위한 본능의 결과이다.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이 거짓말을 하고 나서 진실이 밝혀지고 나면 그제서야 시인하는 경우가 있다. 진실을 말할 용기가 부족해서, 즉, 진실을 말한 이후 자신에게 다가올 피해가 두려워서 거짓말을 했겠지만, 그들을 비난하는 우리도 같은 상황에 닥치면 거짓말을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죄가 없는 사람이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자 그 여인을 비난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뿔뿔이 흩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영화와 드라마에서 보듯, 변호사와 검사가 법정에서 공방을 벌이는 것을 지켜보다가, 법복을 입고 가운데에 앉아 “피고인은 죄질이 안좋으므로 징역 10년에 처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판사가 하는 전체 일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대부분의 시간은 책상 위에 한 가득 쌓인 서류를 검토하는 데에 쓰인다.

변호사는 실제로 무슨 일을 할까? 마찬가지로 위에서 소개한 블로그에 아주 사실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다.

바로 위 블로그에서 인용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의뢰인을 위해 최후변론을 했다. 그러자 방청석에 앉아 있던 수십명의 피해자들은 더욱 웅성거렸고 심지어는 ‘거짓말’이라는 목소리까지 터져나왔다.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수습하고 최후변론을 마쳤다. 재판을 마치고 나가려는 순간 방청석에 앉아 있던 수많은 피해자들이 나를 둘러싸고 “변호사님이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냐며” 고함을 쳤다. 험악해진 분위기에 나는 법정경위와 피고인과 함께 온 교도관들의 경호??를 받으며 간신히 법정을 빠져 나왔다.

다시 나는 오후 5시에 잡힌 수원재판을 하러 차에 몸을 실었다. 이미 난 지칠때로 지쳐있었다. 운전을 하며 나는 정말 거짓말을 한 것일까? 피해자들의 말이 사실일까? 진실은 존재하는 것일까?를 생각했다….머리속이 복잡….아니 미로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멍청이처럼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수원지방법원에 도착했다. 이 사건 다소 논리적을 빈약한 주장을 해야만 하는 사건이었다. 변호사로서 과연 이런 주장을 해도 되는 것일까…하는 그런 낯뜨거운 사건이랄까.

공인회계사의 경우, 하는 일의 범위가 매우 넓으므로 단순화시켜 말할 수는 없지만, 회계사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기업 회계 장부의 사실성을 검토하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라기보다는 만들어진 것을 정리하는 일에 가깝다. 따라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회계사는 적성에 맞지 않을 지도 모른다. 얼마 전, Earnst & Young의 CPA로 일하다가 현재는 Nika Water라는 사회적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Jeff Church의 스탠포드 강연을 들었는데, 그는 CPA를 다음과 같이 우스개 소리로 표현했다.

I spent 4 years in public accounting, Earnst & Young. I really learned what CPA means. It means Cut, Paste, and Attach. (저는 4년동안 Earns & Young의 공인 회계사로 일했어요. CPA가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죠. 결국 자르고(Cut), 붙이고(Paste), 첨부하는(Attach) 일이에요.)

한편, 고위 공무원의 생활은 어떨까?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해 재경부에서 일하다가 스탠포드 MBA에 진학하고 얼마 전에 에버노트에서 여름 인턴십을 마친 백산씨를 통해 이야기를 많이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5급 이상 공무원의 일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 공무원이 되면 좋은 점은 뭔지, 어떤 일이 하며 하루를 보내고 무엇이 힘이 드는지 궁금하신 분은 백산씨의 블로그, 특히 ‘한국 정부와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의 평범한 하루 비교‘ 라는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앞서도 말했지만 공무원, 회계사, 판사, 변호사, 외교관으로서 훌륭한 일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고, 그 직업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이 결국 수많은 직업 중 하나일 뿐이고, 어떤 직업이든 장점과 단점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혹시 고시라는 제도가 야기한 인위적 제한 때문에 직업의 단점에 비해 장점이 너무 커보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당시 나에겐, 표면 가치가 분명 실질 가치보다 커보였으니까.